조선인민군 김단 장령의 어려운 생활

조선인민군 김단 장령은 어려운 생활을 살았다. 현재 구 소련의 여러 지역에서 거주하고 있는 그의 친척들이 김단에 대한 추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김단은 1912년 4월 29일에 하바롭스크의 빈농 가정에서 태여났다. 1925년에 소학교를 필하고 워로실로브 (현재 우수리스크) 7년제 힉교에 입학하였다. 7학년을 졸업한 후에 그는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학업을 계속하지 못하고 원동변강 한까이스끼 구역 <신뚜히녜쯔>꼴호스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1930년에 김단은 워로실로브 사범전문학교에 입학하여 학업을 계속했다. 1933년에 사범전문 학교를 졸업한 그는 1936년까지 <신뚜히녜쯔>꼴호스 소학반 교사로 일했다. 1936년에 김단이 워로실로브에 있는 조선사범대학에 파견되었는데 그는 이 대학과 함께 다른 고려인들과 마찬가지로 1937년에 원동에서 카자흐스탄의 크슬오르다로 강제이주되었다. 대학 3학년을 필한 그는 미완 고등지식을 소유하여 7년제 학교에서 교사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김단을 우스베키스탄으로 보냈다. 1939년부터 그는 타스켄트주 중치르치크구역 소학교들에서 근무하였다. 김단은 역시 그 곳에서 1945년 9월까지 <세웨르늬 마야크>꼴호스에서 문화일군으로 일했고 지방 공청동맹 단체를 지도히기도 했다. 1940년에 김단을 소련공산당에 받아들였다.
1945년 9월에 김단을 붉은군대에 모집하여 북조선에 파견했다. 소련에서 북조선에 파견된 많은 소련고려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통역으로 일했다. 처음에는 함경북도의 웅기시에 자리잡은 소련사령부에서 일하다가 후에 평양에 이주하여 소련 제 25군 위수 사령부의 관리하에서 근무했다. 김단은 소련표창들 - <일본전승>메달, <조선 해방전>메달을 받았다.
소련민사 지도부는 책임성이 높고 유식한 김단에게 주목을 돌렸다. 그의 개인 품성과 실무적 품성 그리고 전쟁전에 그가 쌓은 경험을 고려하여 그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에 특별히 조성된 자격높은 간부양성 학교 교사의 직책에 임명하였다. 

1946년에 김단은 책임적인 새 직책에 임명되었다: 가장 영향력 있는 북조선 지도자들중 하나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무 부상,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위원 김착의 개인 비서로 되었다. 김단은 김착이 1951년에 비극적으로 참사하기 전까지 이 임무를 수행하였다.

김단은 1951-1952년에 제 105 땅크사단 정치부 부장으로 복무하였다. 그 전에 이 직책에서 다른 소련고려인 안동수 (안 블라지미르 스쩨빠노비치)가 근무했다. 안동수는 조선전쟁 초기에 용감하게 전사하였다. 1952-1954년에 김단은 국방성 소속 무장 및 군사기술 계획부 부장으로, 다음 1956년도 까지는 국방성 특무군 정치부 부장으로 일했다.
1956-1958년에 김단은 소장의 군칭을 가지고 조선인민군 제 4 군단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김단은 조선인민군에 복무한데 대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훈장 4개를 수여받았다: 두 급의 국기훈장, 두 급의 자유 및 독립 훈장 그리고 여러 개의 북조선 메달을 받았다.

소련고려인들에 대한 김일성과 그의 지지자들의 관계가 로골적으로 부정적 성격을 띠기 시작했던 1959년에 김단이 소련으로 귀국했다.

소련에서 생활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였다. 새 거주지에서는 관리들이 김단의 이전 공로를 인정하지 않았다. 하바롭스크에서 살게 된 김단은 처음에 열설비 공장에서 일했다. 1962년에 타스켄트에 이주하여 가서 1968년까지 여객운송 지방 자동차 트레스트에서 처음에는 지령원으로, 그후에 인지니어-경제사로 근무하였다. 1968년부터 1970년까지 공화국간 <레닌기치>신문사에서 기자로 근무했다. 김단은 1974년에 사망하여 타스켄트에 안치되어 있다.

이.엔.셀리와노브 – 역사학 박사,

교수, 꾸르쓰크국립대 세계사 강좌장,

<21세기 국제관계> 과학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