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위가 있는 사람은 모두와 화합한다

작가이자 화가인 박 미하일 찌모페예비치는 오늘 그의 활동영역 그런즉 들끓는 창작사업의 장소도 모스크바와 서울 사이라고 한다. 그에게 있어서 이 두가지 직업중 어느 것이 첫 자리에 있는지 모르겠다. 솔직히 말해서 겸손하고 부드러운 유머가 있고 나이가 들었지만 처음으로 세상을 보는 어린이의 호기심을 갖고 있으며 자연스러운 인테리성을 타고 난 이 재능있는 분과 오래전부터 직접 만나보고 싶었다. 바로 이런 품성이 우리 생활의 아름다운 순간을 그리거나 쓰는데 화가, 작가 박 미하일에게 도움을 준다. 우리가 자주 그런 순간을 그저 지나보내고는 후에 재능있는 창작가들의 작품에서 보고는 놀라기도 한다. 박 미하일은 자기의 재능에 의해 모스크바나 한국에서 그의 작품에 대한 수요가 높다. 하긴 카자흐스탄에서도 그를 잘 알고 있다. 미하일 찌모페예비치는 카자흐스탄에서 발행되는 <쁘로스또르>문학잡지의 여전히 반가운 손님이다. 그 어느 한때 미하일은 이 잡지에 자기의 작품들을 게재했다. 운이 좋아 우리는 알마티에서 박 미하일과 잠간 만날 기회를 얻었다. 우리는 문학포럼에서 그와 만났다. 그는 여러가지 언어로 쓰는 한국작가들에 대한 풍부한 자료를 가지고 와서 포럼에서 발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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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이를 테면 불행이 오히려 도와준 것으로 되는구만요…고려인들이 모국 멀리에서 살기에 자기의 고려인 문학을 발전시키게 되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한인작가들이 모국 멀리 타국에서 어떻게 살며 창작사업을 하는지요? 
- 나는 그 테마를 중심으로 세계의 10개의 나라에서 온 작가-동료들사이에서 심문조사를 좀 해 보았습니다. 서로 면목을 익히는 과정에 제가 기자가 된 것 같더라구요. 포럼 참가자들이 다 다른 문화속에서 자라서 일어, 중어, 영어, 독일어 기타 세계 언어로 창작하고 있으며 그들이 한국어로 소통한적이 없지만 하나의 피줄이 그들을 가깝게 합니다. 그런데 마음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온 60세의 김 게리 작가의 회상담이 우리를 놀라게 했습니다. 그는 철학박사이고 마노아 종합대학 교수입니다. 김교수는 영어로 5권의 책을 썼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회상합니다: <나는 한국을 어릴적에 떠났습니다. 때문에 할머니가 저에게 옛말을 해 주던 일, 명절에 할머니가 북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던 일만 기억합니다…한솔의 향기를 잊을 수 없습니다. 그 향내는 나와 먼 모국의 밀접한 연계를 느끼게 합니다>.

-박작가에게도 정든 우리 <고려일보>에 인터뷰의 일부분을 인용할 수 있을까요?
-물론이지요, 더군다나 인터뷰를 한 많은 작가-동료들의 이름과 운명이 흥미있습니다. 그들의 운명은 교훈적인 사연입니다. 그들은 모두 거주국에서 수다한 장애물을 극복하여 유명하게 되었습니다. 그 작가들이 거주국에서 이름있는 작가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인종주의를 감촉하게 되는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니크 파레웰은 작가, 연출가, 시나리오작가 이규석의 닉명입니다. 1985년에 한국에서 이주하여 갔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우리의 현시 세계에서 소수민족은 오직 출신의 원인으로만 박해를 당하고 있습니다. 나를 보고 <얘, 일본놈!>이라고 모욕적으로 부르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마당에서 아이들과 축구를 놀면서 폴투갈어를 배웠습니다. 그래서 친목적 관계를 맺는 방도로 문화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하게도 저의 부친이 나를 학교에 등록했는데 한인이라고는 나와 누나뿐이였습니다.

아스트리드 뜨로찌그 – 스위스에서 온 번역작가였습니다. 그 녀는 어렸을 때 양딸로 가게 되었습니다. 아스트리드가 회상합니다: <나는 부모의 사랑속에서 자랐고 친구들도 많았습니다. 그와 한편 저에게는 한국과 현실적 연계가 전혀 없었습니다. 민족적, 문화적 그리고 지어는 감정적인 연계도 없었습니다. 소수민족에의 소속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나는 1995년에 처음으로 한국에 갔었습니다…서울의 가로수 길을 오랫동안 거닐면서 나의 모국의 분위기를 될 수 있는대로 더 많이 흡수하려고 했습니다…내겐 이것이 부족했고 이것이 필요했습니다. 나에게는 스무살된 아들이 있고 남편은 스위스인입니다. 아들은 물론 나를 걸쳐 한국에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그 후에 나는 아들과 함께 또다시 한국을 다녀 왔습니다. 아들애를 한국문화에 끌어들이려고 하는데 그 과정이 굼뜹니다>.

윤철훈 – 시인, 작가, 기자. 한국국제문학협회 부회장이며 유라시아연구소 소장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였습니다: <나는 한 지역에서 자랐습니다. 중국어로 교육을 받았고 중국어로 글을 씁니다. 중국에서 한국어로 쓰는 작가들은 저에 대해 알고 있지만 조선족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직 최근에 와서야 중국 작가층이 서로 협동동작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문화교류에 관한 많은 행사에 참가했지만 한국작가들에 한해서는 어쨌든 내가 중국 작가입니다. 나는 사실 그렇다고 간주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중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조선족 작가들에 한해서는 내가 중국작가이고 중국작가들에게 한해서는 내가 소수민족 조선작가입니다. 때문에 나는 염소무리속에 있는 양의 처지입니다. 나는 이에 순응했습니다. 어쨌든 나는 자신의 독특한 입장에 만족합니다. 나는 임의의 그루빠중 그 어떤 그루빠에서 제외된다고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의 자체동일성이 이런 것입니다. 공자가 말했듯이 <위풍이 있는 자는 논쟁하지 않고 모두와 화합합니다>.

춘 에위신 – 재일동포. 극작가이자 연출가. 1982년에 요꼬하마영화학교를 졸업했습니다. 1987년에 양산박 극장회사를 창립하였습니다. TV드라마를 많이 제작했는데 그의 연극 두 개를 한국에서 무대에 올렸습니다.

<저의 부친은 그의 자식들이 일본에서 지식을 소유해야 한다고 간주했습니다 – 그는 회상하였다 – 일본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것이 필요했습니다. 아버지는 나와 남동생 넷을 일본학교에 보냈습니다. 이 원인으로 나는 한국말을 하지 못합니다. 내가 오랫동안 한국에서 일했지만 한국말이 늘지 않았습니다. 조선 성을 가진 내가 일본에서는 한국인인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내가 한국말을 잘 하지 못하고 또 사고방식으로 보아 일본인입니다. 일본에서 사는 많은 저의 한국인 친구들이 정체성에서 이런 단절로 하여 고통을 느낍니다. 나는 아직까지도 일본인들의 근거기 없는 그리고 때로는 난폭한 반응이나 냉담한 시선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나는 두 문화에 소속된다는 생각으로 자신을 안심시킵니다…

- 미하일 찌모페예비치, 알마티 포럼에서 발언했을 때 테마가 다는 것이였다고 말했는데요…
-예, 그래요. 나는 대하소설 <토지>번역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을 들어보고 싶었는데요…그러나 내가 발언한 그 테마가 더 적절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토지>에 대해서는 하다못해 제 3권이 발행된 후에 이야기할 수 있다고 봅니다.

-미하일 찌모페예비치, 건강하시고 창작적 성과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박작가의 마음을 몽땅 사로잡은 대하소설이 출판된 후에 다시 만납시다!
-귀 신문사의 성과적 발전과 관심깊은 독자들의 수가 더 늘어날 것을 기원합니다! 

진 따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