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위가 있는 사람은 모두와 화합한다

작가이자 화가인 박 미하일 찌모페예비치는 오늘 그의 활동영역 그런즉 들끓는 창작사업의 장소도 모스크바와 서울 사이라고 한다. 그에게 있어서 이 두가지 직업중 어느 것이 첫 자리에 있는지 모르겠다. 솔직히 말해서 겸손하고 부드러운 유머가 있고 나이가 들었지만 처음으로 세상을 보는 어린이의 호기심을 갖고 있으며 자연스러운 인테리성을 타고 난 이 재능있는 분과 오래전부터 직접 만나보고 싶었다. 바로 이런 품성이 우리 생활의 아름다운 순간을 그리거나 쓰는데 화가, 작가 박 미하일에게 도움을 준다. 우리가 자주 그런 순간을 그저 지나보내고는 후에 재능있는 창작가들의 작품에서 보고는 놀라기도 한다. 박 미하일은 자기의 재능에 의해 모스크바나 한국에서 그의 작품에 대한 수요가 높다. 하긴 카자흐스탄에서도 그를 잘 알고 있다. 미하일 찌모페예비치는 카자흐스탄에서 발행되는 <쁘로스또르>문학잡지의 여전히 반가운 손님이다. 그 어느 한때 미하일은 이 잡지에 자기의 작품들을 게재했다. 운이 좋아 우리는 알마티에서 박 미하일과 잠간 만날 기회를 얻었다. 우리는 문학포럼에서 그와 만났다. 그는 여러가지 언어로 쓰는 한국작가들에 대한 풍부한 자료를 가지고 와서 포럼에서 발언하였다.

Фотография박 미하일 찌모페예비치의 경력은 아주 풍부하다. 문화의 다양성으로 풍부하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문화마다가 개성의 형성에만이 아니라 창작적 활동에, 작가와 화가의 운명에 영향을 주면서 그의 심장속에 흔적을 남겨 놓았다. 그러면 독자들이 판단해 보십시오.

미하일 찌모페예비치는 우스베키스탄의 작은 촌 악꾸르간에서 태여나 그 곳에서 학교를 필하고 타지키스탄 (두산베) 미술전문 학교에 입학하였다. 미술학교를 졸업한 후에 카자흐스탄 (알마아타)에서 살며 근무하였다. 1998년에 러시아의 심장인 모스크바로 이주하게 되었다. 그는 그 곳에서 작가, 화가로 성장했다. 지금은 모스크바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모스크바로 왕래하고 있다. 때문에 최근 년간에 그는 지구촌의 공민으로 자신을 더욱 더 느끼게 된다. 이것을 확증해 주는 사실을 보기로 하자.

박 미하일 찌모페예비치는 <Korean Expatriate Literature> (로스-엔젤스) 잡지 상, 한국 펜-클럽 (서울) 상, 왈렌찐 까따예브명칭 상, KBS 방송국 (한국)상, 꾸쁘린명칭 <석류석 팔찌> (러시아)상 계관인이다. 박 미하일의 미술박람회가 프랑스, 한국, 러시아, 카자흐스탄에서 열렸는데 그중에서 가장 큰 박람회가 근 20개이다. 그의 화폭들은 러시아, 한국, 프랑스, 미국, 터키, 카자흐스탄의 개인 콜렉션에 보관되어 있다. 박 미하일은 장편소설과 단편소설 <천사들의 부두>, <흰 닭의 춤>, <웃는 홍도>, <강을 따른 가벼운 여행>, 단편소설집 <남쪽에 떠도는 구름>, <서울의 방학> 저자이다. 그의 일부 작품들은 영어, 독일어, 한국어로 번역되었다. 

<제가 노령인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계속 탐색중에 있습니다>

-미하일 찌모페예비치, 알마티에 왔다가신지가 오래 되였지요?
-예,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훌륭한 사람들이 살며 경치가 아름다운 정든 땅이 내게 멀어진 것이 아닙니다. 나는 일마티를 사랑하고 카자흐스탄을 소중히 여깁니다. 그것은 내가 바로 이 도시에서 작가와 화가로 성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알마아타에서 기자의 직업도 시작해 보면서 민족적 자체의식과 연관된 사건의 중심에 들어가서 생활의 중요한 경험을 얻기도 했습니다. <고려일보>에서 저의 사업은 카자흐스탄고려인협회 성장의 중요한 사건, 고려인들의 문화적 가치물 재검토의 흥미있는 시기와 때를 같이 하였습니다…그 시기에 내가 유일무이한 고려인 신문사에서 일한 것을 행운으로 간주합니다. 나는 이미 20여년을 알마티를 방문하지 않았거던요…도시가 많이 변했지만 이상하게도 나에게는 모든 것에 정이 듭니다. 지어 건축 면에서 변한 이전 도로와 작은 거리들도 나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아직은 도시에서 방향을 잡을 수 있습니다. 알마티에는 여전히 저의 친구들과 동료들이 많이 살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집에 온듯한 느낌이 듭니다.

-한국에서는 어떤 느낌이 들지요?
-한국에서도 편안한 감이 듭니다. 그런데 나는 많은 것으로 한국과 연관됩니다. 보십시오. 딸애가 한국에서 출가하여 살고 있습니다. 나는 한국에서 창작사업을 많이 합니다. 내가 창작활동을 할 좋은 조건을 조성하여 주는데 대해 나는 동포들에게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회계도 저를 항상 기억하고 여러가지 행사에 초대하며 구 소련의 고려인 화가들의 박람회 조직사업을 돕고 있습니다. 사회계는 한국의 재능있는 아이들의 콩쿨-전시회 조직과 관련된 저의 발기도 지지하고 있습니다. 신선한 아침의 나라에서는 세월이 빨리 흐릅니다. 한 행사가 다른 행사로 계속 바뀝니다. 
최근에 내가 하는 기본 일은 번역활동입니다. 얼마전에 장편소설 <토지> 제 2권을  러시아어로 번역했습니다. 제 1권은 모스크바에서 2016년에 발행되었는데 도서관들과 독자들의 손에 즉시 다 들어갔습니다. 이 장편소설이 20권으로 되었는데 러시아어로 3권만 번역하기로 했습니다. 저와 성이 같은 여류작가 박경리의 이 대하소설은 조선인민의 년대기로, 땅의 소금으로 되는 것으로 하여 가치가 있습니다. 책에 묘사된 사건이  산악벽지의 작은 촌에서 벌어지는데 촌주민들은 문명의 복을 누리지 못하고 지냅니다. 그러나 그 곳에서도 대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특징되는 정열이 들끓고 있습니다. 농민들의 행동에서는 질투, 선의, 악이 나타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생활이 들끓고 조선에서 일어나는 사변들이 양반의 가정에도 영향을 줍니다. 이전에 내가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번역했는데 그것은 현대 작품이였습니다. <토지>는 내가 지금까지 몰랐던 <처녀지>입니다…

-그런데 그 책을 어디에서 구매할 수 있나요?
-서점에는 없구요 도서관에만 있습니다.

-그러면 방금 발행되었는데 재판해야 한다는 말인가요?
-예, 그렇게 됩니다…한국에서는 박경리의 대하소설이 카자흐스탄으로 말하면 무흐따르 아우에소브의 <아바이의 길>, 러시아로 말하면 레브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나 같습니다.

-미하일 찌모페예비치, <고려일보>기자들인 우리는 당시의 창작을 주시하며 성과에 기뻐합니다. 화가로도, 작가로도 유명한 창작인들이 화가들 중에나 작가들중에 소수입니다. 선생님은 어느 쪽을 더 좋아하시는지요?
-솔직히 말해서 내가 최근에 번역을 많이 하다보니 자신의 창작과 연관된 특별한 작품이 없구요 많은 것을 뒤로 재처 두었습니다. 총체적으로 말한다면 나는 일생을 두고 자신의 창작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놓을 수 없습니다. 이를테면 두 예술 즉 문학과 미술이 손을 맞잡고 저를 생활의 길에로 인도합니다. 나는 예술가로서 그것을 위해 살고 그것을 실현합니다. 내가 생각건대 이렇게 독자들이나 관람자들 앞에서 말하기가 수월한 것 같습니다. 저에게는 이렇게 자기의 작품을 쓰기가 편리합니다. 아마 하나가 다른 것을 어떤 식으로 꼭 보충하여 주기 때문에 그럴수도 있습니다. 

-혹시 그것이 독특한 휴식이 아닐까요? 볼펜을 붓으로 그리고 반대로 붓을 볼펜으로 바꾸면서 말입니다…
-그럴수도 있지요 (웃는다). 미술박람회를 준비할 때 글을 쓰지 않는 것이 확실합니다. 또한 반대로 책을 쓸 때는 그림을 그리지 않고요…

-얼마전에 한국에서 있은 미술박람회가 그림에 대한 새로운 태도로 저를 놀라게 했거던요, 마치도 스타일을 바꾼 것 같던데요?
-나는 새로운 수단을 이용하려고 노력하는데요 스타일이나 방법은 바꾸지 않은 것 같습니다. 스타일은 저의 몸속에 베인 것이니 그것을 바꾸거나 변경하거나 잃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해가 갈수록 튼튼해 지고 더욱 더 표현력이 있고 저의 작품을 알아보게 합니다. 한국에서 열린 열다섯번째 그림박람회에 나는 에나멜로 그린 그림들을 내 놓았습니다. 화가가 자기의 사색을 이런 방법으로 표현하는 것은 그림물감을 붓으로 화폭에 바르거나 그리는 것이 아니라 물감을 <붓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화가가 계획한대로 물감이 좁다란 흐름으로 화폭에 흘러내립니다. 여기에서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것을 틀림없이 하던지 아니면 원했던대로 수정할 순간을 놓치기 때문입니다. 방문객들에게는 저의 이런 창작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자체표현의 이란 방법에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앞으로 계속 갈 것입니다. 내가 노령이지만 계속 탐구의 길에 있거던요…

-그런데 미하일 찌모페예비치는 자신의 창작의 형상을 이미 찾은곳 같은데요. 당신의 창작에서 새가 많은 자리를 차지하는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아마 저의 창작에서 그것이 요점이라고 봅니다. 새는 자유로운 존재입니다. 새들은 민족적 소속 기타 임의의 소속에 관계없이 사람들 모두가 하나의 인간의 종족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늘에서 나는 새, 나무가지에 앉은 새, 화폭을 다 차지하는 새의 곁에는 항상 인간의 세계가 있습니다. 이렇게 대충 설명할 수 있습니다. 

절박한 테마

오늘 미하일 찌모페예비츠가 참가하지 않고 진행되는 고려인-작가 포럼이 하나도 없다. 다방면적 개성으로서의 그의 창작만이 관심을 이끄는 것이 아니다. 문학가들은 박 미하일 작가가 이러저러한 사건에 대해 또는 이러저러한 동기와 관련하여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에  관심을 가진다. 그러니 박 미하일이 금년에 서울에서 진행된 국제문학가 포럼 <플렛홈. 평화와 교제>에 참가한 것은 물론이다. 포럼에는 세계의 여러 나라에서 온 한인 작가들이 참가하였다.
-    이것이 문학가들의 보통모임이 아니였습니다 – 미하일 찌모페예비치가 회상한다 – 문학에서 날카로운 테마를 토의하며 문화의 협동에서 아주 효과적이였습니다. 처음으로 한국에 저의 동포-작가들이 많이 모였는데 그들이 모국어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거주하는 나라의 언어로 씁니다. 그들은 다 유명한 작가들로 되었으며 그들의 작품을 오늘 한국어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한국인들은 그들의 창작과 문학발전에 한 그 작가들의 기여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진행된 그 포럼이 이것을 확증하여 줍니다.

진 따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