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해방절에 즈음하여

어린시 절의 해방절 맞이

60여년이 지난지라 많은 것이 기억에서 사라졌지만 정든 향촌 니꼴라옙까에서 맞이하던 해방절만은 기억에 생생하다.사할린주 돌린쓰크구역의 아르센찌옙까에서 근 10키로미터 상거한 니꼴라옙까 촌은 낮은 산들을 등지고 앞에는 작은 강이 흐르는 경치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여름에 산딸기가 무르익는 시기에는 온 농촌에 향기내가 그윽하였다. 우리는 여름방학이면 유리통 (반까)을 목에 걸고 딸기를 따러 다녔고 강에서 물장난을 치면서 재미있게 시간을 보냈다. 농촌 중앙에 7년제 조선학교가 있었는데 농촌과 그 주변에 사는 아이들이 다 이 학교에서 공부하였다.

남성들은 주로 벌목공으로 일했다. 그들은 일제시대에 강제로등에 모집되어 사할린섬에 끌려온 사람들이다. 1945년 8월에 남부사할린이 해방되었지만 그들은 귀국하지 못하고 고향과 부모형제를 그리며 사할린에 계속 남아있게 되었다. <뻬레왈)목재소 주임 김덕문은 그 당시에 쏘련 최고쏘베트 상임위원회의 영예표창장을 받은 첫 조선인이라고 할 수 있다. 목재소는 달마다 계획을 초과수행하면서 구역에서 가장 우수한 목재소로 손꼽히였다. 아코디언을 잘 노는 안명복 작곡가가 곡한 노래 한 구절이 기억에 떠 오른다: <뻬레왈>목재소 명성이 높아류송물 구비구비 어디로 흐르느냐에헤요, 대헤요, 저 멀리서 벌목공의 톱질소리스르렁 스르렁 스르렁 들려온다에헤요, 대헤요, 좋은 것은 벌목일세…

내가 어렸었지만 동네 사람들의 애국심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디에서 그런 애국심이 나오는 것일까? 일제의 억압하에 서 꼼짝못하고 살다가 쏘련군대에 의해 해방되었으니 자유의 날개를 쭉 펴게 되여서 그런것일까? 해방전 일은 내가 어렸으니 그 후에 부모들의 이야기를 듣고 알게 되었지만 해방 이후 3-4년이 지난 후에 농촌의 생활은 기억에 남았다.촌 주민들의 단결심이 강했고 규률이 철저했다는 것을 우선 지적해야 할 것이다. 김덕문 주임이 임의의 사업에 사람들을 동원시키면 한명도 빠짐없이 다 나와 열심히 일했다. 나의 어머니는 풀베기 (손잡이가 짧은 일본 낫으로)에 얼마나 열중하였던지 낫으로 고무장화를 벤 것도 몰랐다. 집에 돌아와서 장화를 벗어보니 거기에 피기 고여 있었다. 감자추수걷이, 풀베기에는 주로 여성들이 참가하였다. 남자들이 거의 다 벌목장에서 일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저녁에는 문맹퇴치 즉 문자편책을 들고 한글을 배웠고 소인예술단에서 공연준비도 하였다. 소인예술단을 이상에 지적했던 안명복이가 지도하였다.

그런데 나의 기억에 가장 생생하게 남은 것은 8.15 해방절 맞이 기념이다. 어머니는 손수 기은 저고리 치마를 내게 입혔다. 트렁크에 넣아 두어 (그 때는 걸어놓을 옷장도 없었으니)여기저기 구겨졌지만 핑크색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은 나는 한없이 기뻤다. 다른 집에서도 명절옷차림을 한 아이들이 하나하나 나오기 시작하였다.명절맞이 행사의 중심은 넓은 학교 마당이었다. 마당의 중심에 원형으로 톱밥이 깔려있었는데 여기에서 아저씨들이 힘을 겨룰 것이다. 즉 씨름판이었다. 씨름, 마라톤, 그네뛰기, 달리기, 달리면서 병 낚고기, 두 팀으로 나뉘어 바줄당기기 등이 경기 종목이였다. 각 종목에서 승리한 자는 상 (물건으로)을 받았다. 달리기 종목에서는 항상 우리 어머니가 일등을 하였다.경기가 끝난 뒤에는 잔디밭에 모여 장만해 온 음식을 차려놓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유괘한 시간을 보냈다. 물론 흘러간 옛노래도 부르고 민요도 불렀는데 고려극장의 연극에서 울려난 <기쁜 날> (김해운 작시, 김 윅또르 작곡)은 남녀로소가 다 같이 불러 스스로 합창으로 변하였다. 이 노래의 한 구절을 아래에 소개한다:

쫓겨간 사람들 다시 오고

옛친구 안고서 돌아돌아 친다

향토의 자유를 평생 잡고

굳세게 자손들 길러보세

에헤 좋다 얼씨구 지화자 절씨구

한많던 강산에 자유 왔네

노래의 이 한 구절을 보고서도 <기쁜 날>에는 해방의 진의미가 담겨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해방절을 맞이하는 주민들의 노래소리는 저녁노을이 비낀 마을 멀리에 산울림마냥 울려펴졌다…

남경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