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에게는 대단히 많은 옛 노래와 새로운 노래가 있다. 현대 한국인은 수십 수백 민요와 신곡을 기억하고 있다. 해외동포, 특히 오랫동안 조국으로부터 고립된 조건에서 살았고 자기의 민족 문화를 발전하고 한반도에서 섭취할 가능성마저 잃은 구 소련의 고려인들은 자주성의 많은 점을 잃었다. 하지만 해외동포들은 어디에서 살든지 자기의 민요를 기억하고 친구들과 파티를 할 때나 가정의 경사에서 노래를 불렀다. 소련 정권은 한국 민요를 금하지 않았고 어느정도 민족 노래를 부르는 것을 격려했다. 그래서 고려인 집단 농장에서 소인 예술단들은 러시아 노래, 소련 노래와 더불어 한국 노래를 꼭 불렀다.
고려 극장이 형성시부터 가요문화에서 큰 역할을 해왔는데 음악 공연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소련의 대조국 전쟁시 극장이 징병점과 야전병원에서 붉은군대 군인들을 위한 공청동맹원들의 연주그룹을 조직하였다. 종전 후 이전처럼 연기재능을 가진 배우들이 극장에서 종사했다. 그들 중 리 니콜라이, 리함덕, 김진, 박춘섭, 김호남 등 가수들이 뛰어났다. 시간이 지나면서, 극장 산하 팝송무용 프로그램에 전문화하는 독립적 창조적인 팀에 대한 필요가 생겼다.
1956년에 극장 지도부는 카자흐 소베트 사회주의 공화국 문화부에 ''극장에 고려 민족 연예악단 창조에 대한''이란 탄원서를 보냈다. 1968년에 극장이 크질오르다에서 알마티로 이전한 후 1960년대 초부터 활동했던 연예그룹을 토대로 보구쉐프스키 애두아르드가 오랫동안 이끌어간 '아리랑' 고려 예술단이 창설됐다. 소련 시대 카자흐스탄에 자리잡은 고려 극장은 이동 서커스처럼 이른 봄부터 늦은 가을까지 고려인들이 살고 있는 전 소련 지대를 돌아다녔다. 순회공연 프로그램에는 2개의 연극과 연예공연이 포함되 있었다. 극장에서 관객들에게 잘 알려진 김 알료나, 김 조야, 김 세르게이, 리 비탈리, 리 마이야와 윤 올레그 같은 명가수들이 활동하였다. '프레미움' 사중창은 고려 극장에서 몇년 전에 조직됐는데 이미 많은 공연도 했고 여러 콩쿨에서 승리를 쟁취했고 표창됐다. 김 세르게이, 리 비탈리, 리 예브게니와 윤 올레그 가수들은 노래를 한국어, 러시아어와 카자흐어로 부르며 한인 정체의 상징이 된 한민족의 찬가 '아리랑'도 불렀다.
한국, 카자흐스탄과 다른 나라들의 연구자들이 가요문화를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정추 음악 학자가 소련 가요문화를 맨 처음에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젊은 시절 모스크바에 와서 차이코프스키 필하모니에서 공부하였고 김일성 우상화에 항의하여 소련에 영주하였다.
1960 - 70년대 그는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서 박사 논문 자료를 수집하였다. 그는 수십 개의 고려인 집단 농장과 국영 농장들을 방문하면서 한국 노래를 녹음했다. 수집한 노래들과 자신의 음악 작품들을 2006년 한양대에서 출판된 3권짜리 선집에 포함시켰다.
카자흐스탄 국립사범대학의 정추 교수가 구소련 여러 지역에서 지난 1959년부터 20년 넘게 채록한 고려인의 노래 자료집과 국사편찬위원회와 한양대학교 한국학연구소가 공동으로 모두 1,000여곡의 가사와 500여곡의 악보롤 지역별로 묶어 세 권의 책으로 간행하였다. 1,000곡이 넘는 가사 내용은 고려인들이 사회주의 국가에서 민족음악을 어떻게 보존하고 발전시켰는지에 대한 풍부한 사례를 보여주었다. 또한 한국이 급속한 산업화로 향촌사외의 전승체계가 와해되어 사라져버린 전래민요도 수록되어 있다.
30년 후에 카자흐스탄 작곡가 한 야코프와 한국 저널리스트 김병학이 정추 선생이 다닌 지역을 방문하면서 노래의 가사들

과 그들의 악보를 수집하여 기록하였다. 그 자료들은 한국에서 출판되었고 CIS, 대부분 카자흐스탄, 고려인들의 민요 가사들과 악보가 실렸다.
카자흐스탄에서 15년 거주한 김병학 시인의 채록 및 편저, 고려인 음악가 한 야꼬브의 채보 및 편곡, 고려인 한글문학평론가 정상진 선생의 증언, 고려인 창작문화단체 <오느늬람빠> 대표 최 타치야나의 재정적 후원을 거쳐, 한국 문화관광부가 '재소고려인 강제이주 70주년 기념사업'으로 후원하여 한국문학 평화포럼의 주도 아래 김준태 시인이 감수하고 이승철 시인이 편집자로 참가했다. 그 결과 총 1,000여 쪽 분량의 책 2권으로 나오게 되었다.
2002년에 본 채보자 한 야코프가 이를 처음 구상하였고 그로부터 2년 후 재원이 마련되어 실행에 들어 갈 수 있었다. 한편 흩어진 노래들을 수집하기 위하여 채보자는 카자흐스탄 전역과 우즈베키스탄, 러시아에 있는 여러 고려인 마을을 다녀왔으며 거기서 채보한 수백 곡의 구전가요를 정리, 편곡하느라 긴 시간과 재능과 정성을 바쳐야만 하였다. 또한 수집된 가사를 편저자인 김병학 시인이 정리하는 데에도 무수한 장애들이 뒤따랐다. 모국어가 사라져가는 환경 속에서 수집된 자료들이라서 가사 필시본의 표기 수준이 현저하게 후퇴된 데다 단어와 문장들이 혼란스럽게 뒤섞여 있었기 때문뿐만 아니라, 노래가 녹음된 테이프의 발음도 판독하기 어려운 것이 많아 그것을 바로잡고 합리적인 편집기준을 마련하는데 긴 고민과 인내가 필요하였다.

주제별로도 특징을 이루고 있어서 조국을 그리워하는 노래, 애국가요, 항일가요, 노동요, 동요, 혁명가, 계몽가, 사랑가, 이별과 슬픔 등 추방자 즉 디아스포라(diaspora)의 운명을 노래한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 앞으로 이 기획이 완성되려면 음반과 영상으로 출간되어 직접 노래를 보고 듣게 되어야 할 것이다.
음악 학자, 문화 학자와 역사가들이 한국에서 많은 저술들을 펴냈다. 그들은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서 현지 조사의 결과물이다. 조사자들은 현지 고려인들과 인터뷰를 하였고 고려인 민요 가수들과 많은 이야기도 나누었다. 김보희 박사가 바로 최초의 답사자다. 현지에서 수집한 자료들을 박사 논문에 실어 2008년에 단행본을 출판하였다.
김보희 박사는 고려인들의 소인예술단이 갖는 의의를 다음과 같이 짚어 내었다. 첫째 이들의 음악활동은 수평적으로는 한국 민요의 지평을 소련으로 확대하였고, 수직적으로는 한국 민요를 고려인과 소련 사회의 맥락에 맞게 전승하여 한국 민족음악의 전통을 새로운 차원으로 계승하였다. 둘째 고려인의 노래는 한국적인 것과 러시아적인 것을 중심으로 서양과 일본음악이 섞인 양상을 보이며, 이주의 아픔이 드러나는 이별의 노래가 많다. 셋째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입각한 한국민요 창작의 지평을 새롭게 열었다. 넷째 고려인 작곡가들은 고려인의 정서를 잘 표현하기 위해 자신들의 음악에서 전래민요와 잡가, 판소리 음악을 폭넓게 활용했다.
러시아 극동지역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한 고려인이 부르는 아리랑을 집대성한 책이 나왔다. 정선아리랑 문화재단은 '중앙아시아 고려인 아리랑 연구서'를 발간하였다. 고려인 강제이주 이후 80년을 맞아 중앙아시아 전승 아리랑 역사와 기록을 정리한 책이다. 진 소장은 2010년부터 러시아 극동지방, 중앙아시아 고려인 1•2•3세대로부터 아리랑을 채록하고 관련 자료를 조사했다. 양장본 488페이지에 아리랑 전승•양상, 아리랑에 대한 인식, 이주사, 예술단 활동 등을 담았다.
진 소장은 "강제이주, 소련 붕괴, 독립 등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 아리랑이 어떤 양상으로 전승됐는지에 대해 주목했다"라며 "중앙아시아 고려인에게 아리랑은 부모를 기억하는 노래, 그리움의 노래, 고향의 노래다"라고 말했다.
한국에서 TV방송국이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의 가수들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도 제작하였다. 다큐 ‘고려 아리랑: 천산의 디바’의 주인공, 75세 가수 방 타마라 영화의 주인공은 두 명의 ‘까레이스끼 디바’다. 고려극장의 1세대 가수였던 리함덕(1914~2002)과 70년대부터 그 뒤를 이은 고려인 3세 방 타마라(2017•사진)의 가수 활동기가 주축이다. 김소영 감독(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의 작품이다.
2017년에 우즈베키스탄에서 고려인 강제이주 80 주년 기념으로 '사샤의 아리랑'을 한국KBS방송국이 특별 다큐멘터리 방송을 제작하였다.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의 한 주인공은 타쉬켄트의 젊은 가수 이 알렉산드라다. 그는 현재 대구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다. 프로그램의 주제에 따르면 그녀는 방학에 자기가 살던 고향 도시에 간다. 거기에서 여러 사람들과 만나는데 그들은 우즈베키스탄 고려인 디아스포라의 유명한 인물들이다. 실제로 영화의 주제는 노래도 아니고 젊은 가수도 아니다. 주인공은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들이다. 상징적인 것은 제목에 전 세계 한인들이 잘 알고 있는 '아리랑'이란 단어가 들어가 있는 것이다
.
한국인들은 서정적 가요를 매우 좋아한다. '아리랑'은 그 중에서 가장 인기있고 즐겨 부르는 노래다. '아리랑'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여러 세대의 시간을 걸쳐 이 노래는 복잡한 발전의 길을 걸어 왔다. 한국의 각 지방의 전통과 풍습에 따라 '아리랑'은 끊임 없이 변형됐다. 학자들은 수십 개의 변형이 존재한다고 한다.
'아리랑' 노래들은 여러 그룹으로 나뉜다. 이 서정적 노래에게는 많은 설이 있다.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에 '연변 아리랑'이 있었고 '독립군 아리랑'도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다른 의미를 담고 있었다. 사랑하는 조국을 해방하기 위하여 외래 침략자들과 싸우자는 열열한 호소가 담겨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리랑'에는 가사와 멜로디가 바뀌었지만 가장 거룩한 것, 민족적 색채와 선율의 아름다움은 항상 남아 있었다. 이 민요에는 멜로디에 삽입된 고생이 많았던 한민족의 영혼이 드러난다. 이렇게 해서 '아리랑'은 시간과 공간 외에 존재하고 있다. '아리랑'은 민족적 확고함, 용기와 창조의 원천으로 종사하였고 지금도 종사한다.

'아리랑'은 오래전에 한반도를 넘어 섰다. 미국, 시베리아, 사할린, 중국과 독일, 그리고 태평양 무인도와 후소련의 중앙아세아에 거주하는 해외동포들의 가요 중에 견고한 자리를 차지했다. 어디에서 살든지 '아리랑'은 우리 동포를 주위 사람들한테서 구분하는 명함이 됐다.
고려인의 아리랑은 선율과 리듬 구조에서 현실을 반영한 가사를 접목한 혼종현상이 나타나는 노래, 보편적 디아스포라의 노래라고 사실을 채록 자료와 설문조사 등 오랜 시간 동안 현지에서 직접 조사한 폭넓은 예증 자료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또한 전문적인 문화예술 집단인 고려 극장의 역사와 연극에서 수용한 아리랑을 정리하였으며 고려 극장과 함께 태동한 아리랑 가무단의 활동이 고려인들의 음악활동 전반에 걸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고찰했다. 아리랑을 주제로 한 주제조사 방식을 통해 아리랑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아리랑에 관한 기억을 더듬어 고려인에게 아리랑은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제보자의 정보와 함께 실린 아리랑의 기억과 기록은 중앙아시아 고려인의 삶 속에서 아리랑을 파악하는 자료로도 손색이 없다.
우연찮게 알마티 고려 음악 코메디 극장의 팝 앙상블이 '아리랑'이라고 불리었다. 카자흐스탄 고려인 협회는 매년 '아리랑'을 주제로 고려인 소그룹 연예 페스티벌을 실현하였다. 고려인이 집중적으로 살고 있는 카자흐스탄과 CIS 지역의 각 도시에 '아리랑'이란 이름으로 카페와 레스토랑이 운영되고 있고 1990년부터 모스크바에서 발간되는 고려인 신문 '아리랑'이 있다. CIS고려인들의 현행 정보 포털도 그 이름을 가지고 있다. CIS 국가들의 고려인 디아스포라의 많은 소인 연예단의 무용 그룹도 '아리랑'이라고 불리운다. 이리 하여 '아리랑'이 고려인 정체의 상징, 고려 문화의 브랜드와 민요의 화신이 됐다.
'아리랑'은 카자흐스탄 고려 극장의 유명한 가수들의 연주 목록에 포함되었다.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인민 배우 리함덕, 방 타마라, 김 조야가 '아리랑'을 노래하였다. 김 블라디미르, 송 게오르기, 김 베냐민 등 극장의 남배우들과 가수들도 '아리랑'을 불렀다. 각 가수들은 각기 유일한 목소리의 음색을 지녔고 독특한 연주 양식을 가졌지만 노래의 영혼과 뜻을 옳바르게 전달하였다.
소련 시대 레코드판에 고려인 노래를 녹음하는 데 관한 아직도 충분히 연구 못한 흥미로운 역사가 있다. 판 몇 개가 전 러시아 녹음레코드 스튜디오의 폰드 '멜로디아'와 다른 회사, 개인 콜렉션에 보관되어 있을 수 있다. 보구쉐프스키 에두아르드가 지도하는 고려팝 앙상블 '아리랑'의 입체녹음한 LP레코드 판이 전 러시아 녹음레코드 스튜디오로 의해 타쉬무하메도프 타쉬켄트 레코드 공장에서 나왔다. 판에는 5 명의 가수 리명상, 조균화, 김 보리스, 김 블라디미르와 타마라가 연주하는2 개의 고려인 멜로디와 8 개의 고려인 민요가 녹음됐다.
아리랑 가무단의 음악활동 가운데 LP음반 취입 등을 통해 소비에트 전역에 아리랑을 비롯한 고려인 노래가 대중화한 과정 등을 분석하였으며 콜호즈를 중심으로 태동해 활동한 소규모 예술단인 ‘앙상블’의 활동을 중심으로 전승되는 아리랑을 살펴보았다.
(계속)
김 게르만
역사학 박사, 교수, 알-파라비카자흐국립대 한국학 연구소 소장,
건국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