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장군의 항일무장투쟁과 고려인 사회

I.머리말
홍범도는 한반도는 물론 해외 한인들 특히 고려인사회에서 크나큰 존경을 받은 몇 안되는 인물 가운데 하나이다. «고려일보»의 김보리쓰 기자는 1994년에 기고한 글에서 홍범도를 ''전설적인 빨찌산이며 열렬한 독립투사''라고 평가했다. 간략하지만 홍범도에 대한 고려인사회의 압축적인 인식이라 봐도 좋을 것이다. 홍범도의 부하들은 홍범도를 '홍대장'으로 불렀는데, 함께 노동하고 고난을 나누며 투쟁했던 지도자에 대한 깊은 존경과 사랑이 담겨 있는 칭호였다. 

대표적인 평민출신의 의병장, 독립군 대장으로서 홍범도는 항일무장투쟁사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불패의 전설을 남기고 있는 인물이다. 홍범도는 1890년대 후반 청일전쟁 이후 항일의병투쟁에서 나선 이래 3.1운동 이후 봉오동전투(1920.6)과 청산리전투(1920.10)로 대표되는 항일무장투쟁을 줄기차게 전개한 항일운동지도자로서 항일무장투쟁사에 독보적인 위상을 차지한 인물이다. 

일본제국주의가 러시아로부터 철수하게 되는 1922년말 시베리아내전의 종결후 소비에트러시아의 사회주의 건설에서의 홍범도장군의 삶과 활동은 자료적 근거가 부족하여 사실적 차원에서조차 확인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특히 1937년 중앙아시아로의 강제이주이후 말년에 대한 연구는 부정확하고 불확실한 부분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홍범도의 말년에 대한 억측과 부정확한 정보가 그럴듯하게 퍼진 것도 그러한 사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하여 북간도지역의 일부 지식인들에 의하여 홍범도의 출신배경에 대한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왜곡이 한국의 언론을 통하여 공공연히 보도된바, 이는 홍범도의 공훈을 빌어 현재적 명예와 이득을 확보하려는 얄팍한 기도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기도의 대하여 홍범도의 말년을 잘 알고 있던 중앙아시아의 한인들이 크게 반발하였다. 

여전히 홍범도의 삶과 항일활동과 관련하여 연구가 보다 심화될 필요가 있다. 어떻게 보면 홍범도에 대한 제대로된 평가는 남북은 물론 해외의 한인사회가 이념적이며 계급적인 제약으로 벗어나고 명실상부하게 남북이 통일된 단계에서야 비로소 가능할지도 모른다. 

이 글에서는 시베리아내전에 종결된 1923년 이후 러시아(소련)에 정착하게 된 홍범도장군의 삶과 고려인사회에서 홍범도 장군이 어떻게 기념되고 추모되어왔는가 하는 점에 중점을 두었다. 그리고 고려인사회에서 홍범도 장군이 갖는 의미, 그리고 홍범도 장군이 삶과 활동과 관련하여 잘못 알려졌거나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사항들을 검토하고 향후의 연구과제로 제시하였다. 


II.망명이후 러시아-만주지역에서의 항일투쟁, 1910-1922

1.1910년대 항일무력투쟁 (독립전쟁) 준비 활동

홍범도가 러시아로 망명하게 된 것(제1차 망명)은 1908년 말이다. 1904년 이후 1908년에 이르는 계속된 전투와 일본군의 가중된 공격과 집요한 추적으로 홍범도부내는 탄환의 절대적인 부족에 빠졌다. 탄환이 없어 총을 버려야할 절박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홍범도는 본래의 탄약확보 방책에 따라 1908년 10월 9일(음력) 혜산진의 일본군수비대(150명)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그러나 이 전투의 결과 불과 수십 명의 의병만 남게 되고 더욱이 일본군의 추격을 받게 되어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 ‘탕해’로 망명하였다. 이때 만주로 망명한 홍범도부대의 의병수는 40여명이었다.  이들은 길림으로 가서 홍범도, 김창옥, 권감찰, 아들 홍용한 4명은 러시아연해주로 넘어가고, 의병 40여명은 ‘탕해’로 되돌아갔다. 

홍범도는 우수리스크, 블라디보스톡륵 거쳐 연추에서 이범윤 등을 만나 김충렬, 조화여의 감금과 자금 탈취를 따진 후, 다시 수이푼으로 가서 국내 진공을 위한 의병자금 모집에 착수했다. 자금을 횡령한 총무 박기만 처형, 그로 인한 문창범 등 지방토호들에 의한 감금, 러시아군대에 의한 석방 등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홍범도는 동지 30여명과 함께 무장하고 함북 무산에 진출하여 17명의 일본군을 사살하는 등 성과를 거두었으나 일본군의 반격을 받아 동행한 의병 모두가 체포되었다. 혼자 살아남은 홍범도는 안도현 내도산으로 탈출한후 차를 타고 블라디보스톡으로 돌아왔다. 

다음호에 겨속


방병률
한국외국어대학 사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