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시작되었던가

…1988년 10월. 우리는 카자흐스탄작가동맹 고려인 문학분과의 작은 방에 모였다. 여기에는 필자외에 장래에 희밍이 있는 젊은 작가들 – 박 미하일, 리 스타니슬라브 그리고 음악가 김 겐나지와 분과장한진 선생이 있었다. 우리는 리 와실리 이와노위츠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부터 긴 세월이 흘러 많은 것이 잊혀져 그 날 회의에 참가한 사람들의 이름을 다 기억할 수 없으며 어떤 문제를 토의하기 위해 모였으며 또 누가 발기자였던가도 잊어졌다. 그런데 다른 것이 중요했다. 국내에는 개편과 공개성의 시대가 시작되었고 어제 금지되었던 것도 오늘은 가능하게 되었다.

1988년 9월 17일부터 10월 20일까지 서울에서 진행된 제 24차 하기올림픽 대회가 그런 정보였는데 이 사실을 감출 수 없었다. 물론 이 대회에 쏘련선수들도 참가했다. 막혔던 구멍이 뚫였다 – 쏘련 중앙 TV방송국은 올림픽에 대한 많은 정보들을 전하였다. 쏘련의 많은 선수들이 쳄피온이 되어 <살아남아>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까지는 수년을 두고 썩어가는 서방사상의 상시적 보급자의 딱지를 붙인 한국에서 무사히 돌아왔다는 말이다. 게다가 한국은 동방에서 쏘련의 충직한 동맹국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립하는 나라였다. 그런데 많은 것이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남았다. 때문에 우리는 와씰리 이와노위츠와의 만남을 애타게 기다렸다. 그는 모국어를 알기 때문에 통역으로 스포츠맨 대표단과 서울에 다녀 온 유일한 고려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또한 안전기관에서 일하기도 하였다. 아마 모국어를 알고 안전부에서 일한 두가지 사정이 와씰리 이와노위츠를 서울에 통역으로 보내기로 한 결정적 요인으로 된 모양이다…

우리 앞에는 나이가 좀 들어보이는 점잖은 분이 나타났다. 와실리 이와노위츠는 그의 직업에 거슬려 아주 평범하고 성의가 있는 사람이였다. 그가 이야기를 시작하자마자 우리는 공식적 선전에 전적으로 반대되는 결론을 가지고 우리와 만난다는 알게 되었다. 와씰리 이와노위츠가 모국에 가서 직접 확인한 것은 우리의 공식적 선전과 하나도 맞지 않았다. 리 와씰리 이와노위츠는 당황해 하고 안전기관의 일군의 튼튼한 축을 잃은 것 같았다. 그런데 마음속에 솟아오르는 감정을 누구에게 솔직히 말할 수 있었으랴! 그가 안전부에 근무한것만큼 카자흐스탄의 자기 동포들과도 많이 사귀지 못했을 것이다. 그 날 우리와 만나기 전까지는…

수많은 청소부들이 쏘련선수들이 사는 올림픽촌에서 청결성과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와씰리 이와노위츠는 쏘련의 한 선수가 중년이 넘은 청소부 여성을 경시하는 장면을 보았다. 그런데 와씰리 이와노위츠는 올림픽을 높은 수준에서 진행하려는 열의에 불타는 많은 서울시민들이 무료로 임의의 일을 할 준비가 되여 있었다는 정보를 이미 알고 있었다. 이상에 지적한 여성이 바로 그런 애국자들중 하나였다. 수도의 한 대학의 교수인 그 여성은 일부로 휴가를 받아 이렇게 무료로 조직자들을 돕고 있었다. 교양받지 못한 젊은이들은 이런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부정적인 점을 얻어보려고 미루 계획했던 자들도 아무것도 찾아보지 못했다. 한국은 88올림픽을 빛나게 진행함으로서 세계문명에 돌파구를 열었다.

바로 서울올림픽이 우리의 의식에 새 구멍을 뚫은 것이다. 우리 고려인들의 기슴은 1988년 가을에 승리자-민족에 소속된다는 큰 긍지감으로 북받쳤다. 그당시 아마 모크바와 딸린, 타스켄트와 하바롭스크, 프룬세와 스웨르들롭스크, 하리꼬브와 두산베, 쩰리노그라드와 까라간다, 우랄스크와 딸듸-꾸르간의 우리 동포들도 그와 같은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이런 환호의 파도속에서 친척들이나 친구들만이 아니라 다른 고려인들과도 교제하려는 소원이 스스로 나타났다. 다음은 정체의 방임을 예감하면서 감정이 점차적으로 행동으로 넘어갔다. 와씰리 이와노위츠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감탄하던 창작인테리 그루빠는 얼마 지나서 우리가 만나서 교제하며 서로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는 그 어떤 고려인 사회단체를 조성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하긴 수십년을 내려오면서 의식속에 박힌 <사상순종>본능이 작용하여 상부의 승낙을 받기로 결정했다. 그당시에 정권에 가까운 기관 (공화국 인민통제위원회)에서 근무하던 나에게 이 사명을 맡겼다. 정부의 공식통신사 카스따그에서 저의 동료 알베르트 사듸꼬브가 일했는데 그는 카자흐스탄공산당 중앙위원회 직원들을 많이 알고 있었다. 그의 도움을 받아 선전 및 선동부 부장 게오르기 이와노위츠 세스따꼬브와 만났다. 그는 부부장과 만나 이야기할 것을 제의했다. 그런데 서울올림픽이 쏘련에 사는 고려인들에게 거의 잊혀져 가는 자기의 뿌리를 찾으며 모국어, 전통과 문화를 되살리려는 열망을 불러일으켰다는 나의 이야기가 뜻밖에도 부부장의 이해와 지지를 받았다. 발기를 구체화하여 알마아타시 구조에 기기로 하였다. 그것은 사회단체가 아직은 알마아타고려인들에게 목표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고무감에 날 것 같았다. 나는 동료들에게 <허가 받았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

알고보니 민족적 자체의식의 <바이루스>는 공화국의 기타 민족들 사이에서 즉시 전파하였다. 카자흐스탄공화국은 다양한 소수민족이 나라에 거주하는 것을 항상 자랑하였다. 독일인들과 체첸인들이 특히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들의 운명은 많은 면으로 보아 고려인들의 운명과 비슷하다. 그들은 전쟁전에 카자흐스탄에 강제이주되었다. 이렇게 알마아타시 문화센터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오직 다음해 가을에라야 시소베트에 등록되었다. 그전까지는 민족운동의 고무감에 불타는 동향인들의 열의와 도움에 주로 의거했다.

1988년 가을에 사회사업의 첫 시련을 겪게 되었다. 타스켄트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 평양예술단을 접대하여 공연을 조직해 달라는 것이었다. 북한 배우들이 우스베키스탄을 장기 순회공연하는데 알마아타에서도 공연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거의 40명이 되는 배우단의 숙박, 식사, 공연을 조직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였던 것은 물론이다. 필라르모니가 해결해야 할 이 조직문제를 아직 등록되지도 않았으며 예산에 돈이 하나도 없고 위원장을 비롯하여 직원들이 무료로 근무하는 조건에서 문화센터가 담당하다니?! 필자는 그 때 160루블리의 봉급을 받으면서 인민통제위원회에서 계속 일하고 있었다. 그러나 큰 호기심, 아직 해 보지 않았던 일을 해 보려는 소원 그리고 새파란 청춘의 무진장한 열정은 나로 하여금 그 제안을 받아들이게 하였다…

여러가지 와리안트를 다 생각해 보았는데 결국 한가지 현실적 방도를 찾아냈다. 알마아타의 대규모적 건설회사인 <알마아타질스트로이>트레스트에서 량 아나똘리가 총 기사로 일했으며 니 겐나지는 직맹위원회 위원장이였다. 국영건설 독점회사들에 그랬듯이 상기 건설회사도 자기의 문회회관, 시외에 휴양소가 있었다.

상기 건설회사를 찾아가서 인사를 하고 사정을 이야기 했다. 그리고 민족적 의식에 대한 이야기도 하면서 약간의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 보건대 우리의 의도를 지지한 것 같았다. 그러나 결정은 총지배인이 하는 것이다. 이 때에 이르어 북한예술단 단장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훈예술 활동가 손석환이 이미 알마아타에 왔다. 그 분과 함께 총지배인을 만나러 갔다. 총지배인은 외국대표와 실무적 접촉을 맺을 가능성을 내다보았던지 배우단을 받아들이고 문화회관을 공연장으로 내 주고 휴양소에 배우들을 투숙시킬 것을 동의했다. 그런데 그 시기는 아직 걍제적 자유의 시기가 아니었다는 것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상세한 부분들이 잊혀지기는 했지만 <평양예술단>은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악기를 타는 30명의 아름다운 아가씨들로 이루어 졌었다는 것은 어제처럼 기억하고 있다. 한달 반동안 순회공연시에 그들은 가는 곳마다에서 대 환영을 받았고 선물과 관람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배우들은 그동안 조국에서의 엄격한 생활양식을 어느 정도 벗어났다고 할 수 있다. 가장 놀라운 것은 재능있는 이 순진한 배우들이 우리와 거의 차이나지 않았으며 소통과정에서도 서로 이해가 되어 별로 문제가 없었다.                                                 

<러시스끼예 꼬레이쯰>신문 총주필, 러시아공훈문화 활동가 천 왈렌찐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