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가을에도 아름다움이 있다

많은 노인들은 <나이가 들면 반가운 일도 없고 그저 인생의 막이 내리기를 기다릴 뿐이지…> - 이렇게 슬픈 생각에 잠겨 하소연하군 한다. 그런데 알마티 시재판소에서 판사로 수년을 근무하다가 지금은 은퇴중인 박 표도르 게오르기예위츠는 자기 인생의 가을을 그렇게 우울하게 보지 않는다. 그는 27여년을 판사로 일했다. 내년에 그는 80주년을 쇠게 된다.
-나의 많은 동년배들과 마찬가지로 나역시 생활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전후에 우리의 아동시절은 두말할 것 없이 힘들었고 나이가 어려서부터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운명을 한탄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 나는 일생을 살아오면서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나 내가 마음에 드는 직업을 전공하고 그에 이바지했습니다. 우리 부부는 훌륭한 자식들을 자래워 지금은 손군들이 나에게 배려를 돌립니다. 안해는 유감하게 이미 내 곁을 떠났습니다. 내가 운이 좋아서 그런지 나는 항상 필요한 시간에 필요한 곳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표도르 게오르기예위츠가 과거에 적극적인 활동을 했다고 해서만 나이를 한탄한적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일생에 한번도 그 어떤 시기에도 자신을 필요없는 사람으로 느껴본적이 없으며 항상살기가 재미있었다.

표도르 게오르기예위츠는 국가를 대표하는 사람이였다. 그의 활동, 노동경력을 잘 알고 있는 자식들과 손군들, 친구들과 동료들이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하기를 좋아한다. 표도르 게오르기예위츠는 개별 은퇴자이다. 이것은 그가 국가앞에 세운 공로에 대해 국가가 특별히 배려하며 후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이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국가앞에 세운 공로에 대하여>라고 일반적으로 말하지만 그에게 대한 이런 태도에는 모든 근거가 있다. 카자흐스탄판사동맹은 2005년에 박 표도르 게오르기예위츠에게 <우스 비>명예휘장을 수여했다. 판사의 일에 수년을 이바지한 그는 <원로>메달로 표창되었다.

박 표도르가 판사로 일하는 과정에 불법적으로 판결을 받은 자가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이 그의 직업적 긍지로 된다. 이것은 그가 한번도 양심에 어긋나게 행동하지 않았으며 가족들의 안정을 소중히 여겼고 자식들 앞에서 얼굴을 붉힐 일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직한 노동은 깨끗한 양심표도르 게오르기예위츠에게도 그와 같은 직업을 가진 많은 판사들과 마찬가지로 유혹을 느낄 수 있었던 순간이 많았을 것이다. 뇌물받이와 상시적으로 투쟁하지만 재판과정과 연관된 일에서 뇌물행위가 존재하는 것은 비밀이 아니다.

-뇌물행위가 있는 것이 비밀이 아닌데 표도르 게오르기예위츠에게 뇌물을 주려고 한 일이 한번도 없었나요? 
-물론 그런 시도가 한두번이 아니였습니다. 어떤 때에는 주택을 살 수 있는 거액을 제의한적도 있었지요 – 표도르 게오르기예위츠가 회상한다 – 그러나 저에게는 깨끗한 양심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었습니다. 수입과 봉급이 항상 달랐지만 우리 가정은 정직하게 번 돈으로 두칸짜리 아파트에서 살면서 만족을 느꼈습니다. 나는 운이 좋아서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의 지지를 항상 받았습니다. 나의 안해 안또니나는 나를 항상 지지했습니다. 안해는 모든 일에서 나를 받들었고 나 때문에 출세도 하지 못했습니다. 판단해 보십시오, 의학대학을 최우등 성적으로 필하고 약제사로 일했으니까요. 내가 판사로 일하던 년간에는 판사를 선거했으니 안해도 나의 직장에 따라 거주지를 상시적으로 바꾸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우리가 뇌물행위를 이겨낼 수 있을까요?

-이상에 가까우며 나무랄데 없는 법이 실시되는 그 어느 한 국가도 아직 이 악을 이겨내지 못한 것이 주지의 사실입니다. 어떤 나라에서는 뇌물행위에 대해 사형을 하는걸로 알고 있는데요…손버릇이 나쁜 사람은 아무것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아마 그런 사람들의 천성이 그런가봐요. 우리가 그들을 <부양>하는 셈이지요, 보다 결단적으로 처리해야 합니다…

-표도르 게오르기예위츠는 그런 사건과 부닥치지 않았지 않습니까? 

-저는 성격이 다른 편이지요, 가족들의 안전을 앞세웠거던요. 정직한 노력으로도 물질적 부를 배가할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신념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남다른 사람으로 느낀적이 없었습니까?

-물론 있었지요, 그런데 지어 동료들까지 나의 정직성을 상시적으로 검열하는 것이 저로 하여금 모욕감을 느끼게 했습니다. 예를 들어 한번은 저의 상사가 우리 집으로 오겠다고 자청했습니다. 그래서 초대했지요. 그는 묵묵히 우리 주택을 유심히 둘러보면서 자기의 의심을 확증해 주는 것을 찾으려고 했던 모양입니다. 지어 우리 집에서 자기까지 했어요. 눈치를 보니 몹시 실망한 것 같았어요…
 

생활은 적극적이고 사교성이 많은 사람들을 좋아한다.

표도르 게오르기예위츠는 건장한 장수와 같은 체격을 가진 사람들 축에 속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에게도 년년이 내려오면서 쌓인 문제들이 있다. 그러나 그는 그 문제들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으며 묵묵히 혼자서 문제를 풀어 나간다. 생활 조건은 그를 어릴적부터 단련시켰다. 표도르 게오르기예위츠는 어려운 아동시절을 겪은 세대에 속한다. 전쟁이 끝났을 때 그의 나이가 다섯살이였다. 그는 건강이 쇠약했지만 열심이 많아 학교를 성과적으로 졸업했다. 부모들을 조금이라도 돕기 위해 타스켄트 자동차수리공장에 수리공으로 취직했다. 18세에 군대에서 복무하기 시작했는데 중병에 걸려 수술을 받은 후에 노동불능 제 2급 장애자로 확정되었다. 건강회복에 오랜 세월이 흘렀다. 1964년에 젊은 표도르는 알마아타 끼로브명칭 카자흐국립대 법학부 야간과에 입학했다. 그 때로부터 그의 생활은 공정성을  확정하며 판결의 범위내에서 악행과의 투쟁과 연결되었었습니다. 1970년 11월에 그를 쩰리노그라드주당위원회 행정부에 초대하여 주의 임의의 구역의 선거에 의한 인민판사의 직책을 권하였다. 

-나는 운이 좋아서 경험이 많은 점잖은 판사와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압드라흐만 깔리물린 판사는 참전로병이였습니다

– 표도르 게오르기예위츠가 회상한다 – 우리가 한 임기를 함께 일했습니다. 임기가 끝난후에 나는 구역의 인민판사로 선거되었습니다. 인민판사의  임기가 끝나자 카자흐공화국 검찰소에 소속되는 기관들에서 근무했습니다. 다음 쩰리노그라드주 검사 유.아.히트린의 지시에 따라 1982년에 쩰리노그라드주 (현재 아크몰린스크주) 꿀진스끼구역 검찰 보조자로 임명되었습니다. 1984년 9월에 세미빨라찐스크, 다음은 알마아따 운수검찰소 소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1990년 1월에 나를 알마아따시 알라따우구역 인민재판소 소장으로 선거했습니다. 알마티시 재판소 위원으로도 몇 년간 근무했지요. 그 후에 카자흐스탄공화국 대통령의 정령에 의해 저에게 알마티시 재판소 판사의 직책을 맡겼습니다. 이 직책에서 계속 근무하다가 2004년 말에 은퇴했습니다. 간단히 말한다면 나의 이력서가 바로 이렇습니다.

각자에게는 그의 가을이 있다

우리는 해마다 노인의 날에 우리의 가까이에 있는 노인들의 얼굴을 특히 자세히 들여다 본다. 하긴 그 분들이 우리가 곁에 있지 않으며 상시적으로 배려를 돌리지 않아 때로는 외롭다는 말을 하지 않지만 우리는 물어본다: <자손들이 다 직장을 다니노라고 바쁜 나날을 보내는데 은퇴하여 적적하게 나날을 보내는 마음이 어떤가?>고 묻곤 한다. 
-표도르 게오르기예위츠, 은퇴하시면서 시간을 어떻게 보냅니까? – 원로더러 물어보았다.
-한가한 시간이 없습니다 – 표도르 게오르기예위츠는 미소를 짓는다 – 이상하게도 직장을 다녔을 때 지금보다 시간이 더 많았던 것 같애요. 자 보십시오 – 손군들에게도 나의 주목이 필요하거던요, 가능한 대로 그 애들을 돌봐주고 의견을 듣고는 충고도 줍니다. 집에 있을 때는 음식을 장만하기 좋아합니다. 우리 딸애가 물론 다 합니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요리가 있거던요, 그러니 시간이 나면 왜 장만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또 나는 가만히 앉아서 해 주는 음식만 먹는 성격이 아니거던요. 아침에는 모두 직장, 학교로 가면 나는 웨스놉까 강변으로 갑니다. 최근에 시 정권은 그 곳에 건강의 오솔길을 가꾸어 놓았는데 곳곳에 건강을 튼튼케 하는 스포츠장치도 세워놓았습니다. 신체를 좀 단련시키면 몸이 가벼워지고 기분도 상쾌합니다. 때로는 친구들과 고기잡이도 갑니다. 내가 고기잡이를 몹시 좋아하거던요! 물고기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낚시대를 들고 자연의 품속에 있는 것이 좋다는 말입니다. 이전에는 사냥을 다녔는데 지금은 건강상태로 총을 낚시대로 바꾸게 되었습니다. 화투도 좋아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것이 도박이 아니라 역시 서로 교제하는 자리로 됩니다. 일주일에 몇번 <아직은 해질 무렵이 아니다>라는 비형식적 모임에서 만나기도 합니다. 

-그런 모임에서 짝을 만난다는 말을 들었는데요…

-그런 일도 있지요, 그런데 나는 그것을 목적으로 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안해와 일생을 살아온 결과 그런 안해가 더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외로움을 느낀적이 있습니까?

-아니예요, 저는 외로움을 모릅니다. 사람이 외로움을 궁리해 냈다는 느낌이 때로는 듭니다. 네가 누구에게 필요하고 시간을 함께 보내기를 재미있어할 때까지는 외로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생활의 경험에 의해 굳어진 저의 신념입니다.
생활을 사랑하는 박 표도르 게오르기예위츠는 바로 이런 낙천가이다. 생활은 그를 지혜롭고 선량한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는 법을 꼭 <대자>로 보고 있다. 또한 그에게는 자기의 법도 있다. 바로 그 법에 따라 사회의 튼튼한 핵심인 가정을 꾸렸고 자식들을 키워 그들이 원하는 직업을 전공하게 하였다. 그의 가을은 달력의 가을과 같다 – 결실을 딸 때가 되었다. 생을 훌륭히 살아왔으며 그 생의 맥박이 손자들에게서 고동치고 있을 때에 어찌 슬픔에 잠길 수 있으랴?

진 따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