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S 고려인소수민족과 분단된 한반도의 무용

한국민족무용은 샤먼의 원시적인 동작을 비롯하여 먼 과거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무용의 내용, 형태 종류에 차이가 났으며 음악과 동반되었다. 평민들이 추는 춤과 궁중무용이 오랜 기간 서로 현저히 차이가 났다. 조선에서 러시아 원동에 이주한 한인들의 춤은 함경북도와 편안도 종교적인 색채를 띠었었다. 민속무용은 대대손손  내려오면서 전해졌다. 본 기사는 구 소련고려인들의 잘 연구되지 않은 부분인 무용 테마를 다룬다. 기사에서는 소련과 CIS 고려인들의 민속무용 보전 및 세대간 전달, 상기 무용에 북한 및 남한 무용 영향의 분석을 시도해 본다. 본 자료에는 궁중무용 혹은 1920년대에 창작된 이른바 <신무용>이 아니라 민속무용에 대해 이야기 한다. <신무용>을 <근대 무용>이라고도 한다. CIS 고려인들의 무용예술에 대한 무용이 태여난 한반도의 영향의 특성은 북한과 남한으로 이루어진 모국과 고려인 디아스포라와의 접촉상태의 콘택스에서 연구된 것이다. 

 고려인들과 북한 및 남한과의 연계 

구소련의 고려인들이 북한인들과 긴밀한 친선적 연계를 유지했다고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실지에 있어서 이와 같은 확언이나 예언이 현실에 맞지 않는다.  공식적 수준에서 소련정부가 평양에 정치적, 군사적 및 경제적 지원을 한 것은 물론아다. 소련고려인들은 <상부>의 이런 관계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런데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후에 근 500명의  소련고려인들 (가족들을 포함하여) 이 공산당의 과업을 맡아, 심장의 부름에 따라 북조선에서 사회주의 건설을 돕기 위해 평양에 갔다. 정치적으로 열성이 있는 소련고려인들이 근 200명을 이루었다. 그들 중에는 문화부문의 관리들이 있었는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문화 및 선전 부 부상들인 소련고려인들 정상진, 기석복을 지적할 수 있다. 북조선에서 사업한 소련고려인들의 많은 대표들이 교육, 정기 간행물, 문학, 예술 분야에서 적극적 활동가들로 되었다. 그들은 다 평양에서 지도 및 조직 사업의 큰 경험을 얻었다.

소련이 붕괴된 후에 북조선은 카자흐스탄, 우스베키스탄, 러시아 고려인들괴 관계를 맺고 발전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평양은 문자편, 교과서, 사전을 보내왔으며 북한 교수들이 남한 교수들보다 먼저 잊혀진 모국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태권도 ITF 웨르시야는  한국의 WTF 보다 더 일찍, 더 널리 알려졌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 주카자흐스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사관이 닫기고 타스켄트와 모스크바에 있는 대사관들의 적극성이 낮아지자 고려인들과 북한인들간 연계가 끊어지기 시작했다.

한국에 대해 말한다면 구소련 자주국들과 외교관계를 수립한후부터 무역-경제 및 문화 협조를 급속히 발전시켰고 해마다 그것이 확대되여 갔다. 구소련 고려인 수천명이 한국을 방문할 수 있었고 동시에 수천명의 한국인들도 알마타, 타스켄트, 모스크바 기타 구소련의 대 도시들에 왔다. 한국재벌들 (대우, 현대, LG, Samsung 기타) 카자흐스탄, 우스베키스탄, 러시아 경제에 수백만 달러를 투자했다. 최근 25년간에 문화 분야에서 협조의 범위, 형태와 종류가 수십배로 장성하였다.

소련고려인들에 한해서 유일한 모국으로 되려는 평양과 서울의 대결은 구소련의 고려인소수민족 단체들을 분열시켰다. 이런 사실이 재일 동포들 사이에서 이미 있었다. 소련에 두개의 소수민족 단체  - ACOK (조국통일협력협회)와 BACK (전국 소련고려인협회)가 생겼다.

고르바쵸브 개편시기와 소련붕괴 이후 첫 년간에 북조선에 대한 소련고려인들의 동정심이 보존되였었다.  그것은 소련고려인들이 소련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간 영원한 친선과 프로레타리 연대성의 선전과 구호의 영향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설립된 고려인 협회들은 평양과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1990년 중순에 상기 소수민족 단체 지도부가 한국과의 협조를 확대하기 시작했다. 카자흐스탄의 고려극장, 한국교육원, 카자흐스탄고려인협회와 문화센터들, 아마추어 무용단 및 합창단이 한국정부, 비정부 기관, 개인들에게서 지원을 받기 시작했다.  북한은 나라에서 위기사태와 관련하여 소련고려인들에 대한 지원 프로그램을 줄이게 되었다. 구소련 고려인 소수민족에 영향을 가하기 위한 경쟁에서 한국이 북한을 앞섰다.

분단된 한반도의 무용

1950-1990년대에 소련고려인들의 민속무용에  북한 무용술의 영향이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 이에 는 원인이 있는데 그것을 테제의 형태로 아래와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우선 선조들 혹은 소련고려인 제 1세가 북조선 출신이다. 때문에 그들에게는 한반도의 북부에 놓인 함경북도와 편안도의 무용의 요소들이 더 가까웠다. 

1945-1955년에 사회주의 건설을 돕기 위해 북한에 파견된, 가장 유식하고 지도자적 능력이 있고 조선어를 잘 소유한 고려인들이 북조선에서 장기간 살다가 소련에 귀국했다. 그들은 민족무용을 비롯하여 북조선의 문화와 예술을 잘 알고 있었다.
소련시대에 남한과의 접촉이 전혀 없었다. 때문에 북조선의 무용만이 소련과 동방블럭 나라들에 알려져 있었다. 유명한 무용가들중 하나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훈배우 최승희가 평양에서 모스크바로 순회공연을 온 것이 뜻깊은 사건으로 되었다. 최승희는 조선민족무용을 소련관람자들에게 널리 알렸다. 조선의 특출한 무용가이고 안무가인 최승희는 일본안무가 이시이 바쿠의 무용전문학교에서 배웠다. 최승희는 조선의 전통적인 무용예술을 토대로  새로운 사조<신형 무용>을 창작하였다. 최승희는 자기의 예술을 서방 나라들, 북미와 남미, 중국과 일본에서 선전하였다.
어머니를 뒤이어 최승희의 딸 안승희가 소련에서 조선무용을 가르침에 중요한 역할을 놀았다. 안승희는 소련 대극장에서 무용술을 배웠으며 조선무용을 가르쳤으며 책도 썼다. 1957년에 러시아어로 두판으로 발행된 이 책은 조선무용을 배울 수 있는  독특한 교과서로 되였다.  

1955년에 타스켄트 극장대학내 조성된 조선배우학부에서는 학생들에게 배우연기, 성악, 음악, 북조선 무용을 가르쳤다. 그들은 대학을 졸업한 후에 모두 크슬오르다시 조선음악희곡극장 배우들로 일했다. 그후에 입학한 조선과 학생들도 같은 프로그람마에 따라 북조선 무용을 배웠다.

1969년에우스베키스탄에서 직업적 첫 성악-무용단 <가야금>이 조성되었는데 이는 소인예술 무용단에서 조선무용을 배우는데 큰 역할을 놀랐다. 1940년에 조선에서 태여난 황정옥이가 북조선 무용보급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황정옥은 평양무용학교를 필하고 소련에 올 때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립무용단에서 근무했다.  김 브루트의 말에 의하면 황정옥이가 공부할 목적으로 모스크바에 왔었다. 소련공산당 제 20차 대회에서 스탈린의 개인숭배를 규탄한 후에 평양은 자기의 유학생들을 급히 소환하였다. 황정옥은 북조선에 귀국하기를 거절하고 타스켄트에 남았다. 그는 이 곳에서 타스켄트 무용학교를 졸업하고 다음에 모스크바 극장대학을 필했다. 황정옥은 수년을 이름난 <바호르>무용단에서 근무했다. 황정옥은 인기있던 고려인협주단 <청춘>의 무용종목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상기 협주단 예술지도원 황 찌모페이 (1971-1973)가 아래와 같이 회상한다: <무용예술 분야에서 아름다운 미모를 가진 황정옥이가 이름을 떨쳤다. 그가 창작한 무용은 <가야금>과 <아리랑>, 소인예술단의 공연종목에 오래동안 남아있으면서 관람자들의 대절찬을 받았다. 그의 몸매는 그가 직업적 무용가라는 것을 즉시 알려주었다. 황정옥이가 소련고려인들 사이에 나타남으로서 조선무용에 대한 태도가 변했다. 우선 춤이 다양해졌다. 부채를 가지고 무대에서 떠 다니던  동작은 보다 의미가 깊은 동작으로 바뀌였다. 유감스럽게도 그는 소련에 오래 머물지 못했다 – 소련고려인들 사이에서 자기의 배필을 만나지 못한 황정옥은 결국 귀국했다. 소문에 의하면 그가 오스트리아인과 결혼하였다고 한다. 황정옥이가 떠나간 후에 소련고려인 무용문화가 오래동안 새로운 종목을 갱신하지 못했다.  이 공간을 채우려는 지방 안무가들의 일부 시도가 실패하고 말았다. 황정옥의 무용처럼 무용구성이 완성되었다는 감이 없었다>.

1980년 후반년부터 1990년 중순까지 북조선 무용술이 우스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고려인들 사이에서 조선민속무용 재생에 결정적 역할을 놀았다. 타스켄트 고려무용단 지도자, 안무가 한 마르가리따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우스베키스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안무가들의 지도하에 몇개의 소인예술무용단이 형성되었다. 1989년에 우스베키스탄 극장활동가 동맹 직속 고려인 극장-스튜디오 <신-생>이 조성되었다. 이 스튜디오는 북조선 무용예술을 적극적으로 소개하였다. 이 집단의 종목에는 <결혼식>, <탈>과 같은 의식의 의의가 있는 무용이 있는데 이 무용을 북조선 안무가들이 창작하여 무대에 올린 것이다. <신-생>집단은 직업적 협주단 <청춘>과 함께 평양에서 있은 <4월의 봄>국제축제에 여러번 참가했다. 한 마르가리따의 말에 의하면 안무가들인 김해춘 좀 늦게는 김성년이 무용을 창작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무용연습 과정에 조수들이 안무가들을 열심히 도왔다고 한 마르가리따가 말했다.

이상에 지적한 시기에 카자흐스탄에서도 적게나마 북조선의 영향을 느낄 수 있었다. 고려극장이 알마티에 있고 우스베키스탄 고려인들이 평양의 영향 대상으로 선택된 것이 카자흐스탄이 북조선의 영향을 적게 받은 원인으로 되였을 수도 있다. 평양이 1990년에 주알마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사관을 닫고 타스켄트에 대사관을 남겨둔 것이 우연한 일이 아니다. 대사관은 2016년 7월까지 타스켄트에서 활약했다. 고려인들의 다수가 자지방에서 소인예술을 재생시키기 시작한 1980년 말부터 시작하여 그리고 그 후 1990년 초부터 첫 개인 무용스튜디오와 무용강습소가 열리자 고려극장에서 일하던 우수한 무용가들에 대한 수요가 높아졌다. 카자흐스탄에서는 공화국 인민배우 김 림마 이와노브나가 많은 후배들을 양성했는데 그들은  후에  자기의 무용그루빠들을 조직하였다.  초기에 이 반직업적 및 아마추어 무용그루빠에 북조선 색채의 무용이 다수였던 것이 당연한 일이다. 

러시아 원동에 이주해 온 한인들이 민족명절과 가정 경사에 보통 농무를 추었다는 것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고려극장이 소련고려인들의 무용문화 발전에서 결정적 역할을 놀았다.

소련시대에 성과적으로 일하는 고려인 꼴호스들에서는 자체 아마튜어 무용단을 조직하였다. 타스켄트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놓인 지미뜨로브 명칭 꼴호스, <뽈랴르나야 스왜스다> (북극성), <세웨르늬 마야크> (북극 등대) 꼴호스 아마튜어 성악 및 무용 협주단들이 큰 인기가 있었다. 그리고 타스켄트주 <뽈릿옷젤>꼴호스에 조직된 <청춘>여성무용단이 가장 널리 알려졌었다.  첫 직업적 성악-무용 그루빠 <가야금>이 1969년에 조직되었는데 이 협주단은 우스베크국립필라르모니야에 소속되었다.

카자흐스탄에는 이와 같은 소인예술단이 크슬오르다주의 구역들과 딸듸꾸르간 주 까라딸 구역의 고려인들의 이전의 이주 꼴호스들에서 1950-70년대에 활동하였다.

고려인들의 대중적 도시집중화 그리고 이주해 온 꼴호스원들이 농촌지방에서 도시로 거주처를 옮김으로서 카자흐스탄에 있던 이전 고려인 꼴호스들이 1980년대에 민족적 특성을 잃게 되었다. 우스베키스탄에는 큰 고려인 꼴호스들이 소련이 붕괴되기 직전까지 겨우 보존되여 있었다. 그러나 고려인 소인예술단들의 활동이 이미 약해졌고 1980년 중순에는 사라질 위험에 처하여 있었다.

개편과 민주화는 모든 소련인민들에게 자기의 뿌리를 다시 찾으며 민족의식, 풍습, 무용, 가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모국어를 되살리려는 희망을 안겨 주었다. 러시아, 카자흐스탄, 우스베키스탄 기타 구소련 공화국들이 한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함에 따라 한국 문화, 예술 그리고 한국에서 제작하는 모든 물품에 관심이 커지기  시작했다.
카자흐스탄과 우스베키스탄에서 추는 조선무용을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직업적 무용, 반직업적 및 아마튜어 무용. 직업적

무용에 대해 말한다면 알마티 국립고려극장을 념두에 두는 것이다. 이것은 소련에서 유일한 극장이였다. 카자흐스탄과 우스베키스탄에는 몇개의 반직업적 무용단과 아마튜어 무용그루빠가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  

김 게르만 – 역사학 박사, 교수, 알-파라비 명칭 카자흐국립대 중앙아시아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