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세에도 인생은 한창

니 윅또르 학쑤노비치는 요즘 탄생 80주년을 맞이하고 있다. 보통 탄생일을 맞이하는 사람에 대해 기사를 쓸 때면 그 분이 걸어온 생활의 길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것은 바로 그 생활이 그에게 출세와 성과를 가져왔으며 만 사람들의 존대를 받게 하였기 때문이다. 윅또르 학쑤노비치에 대해 말하면서 80고개에 오른 그 분이 오늘도 원기왕성하고 반세기를 바친 사업을 계속하고 있으며 세월이 흐름에 따라 더욱 더 소중해지는 친구들이 그의 주위에 항상 있다는 것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하긴 임의의 성공한 사람에게 있어서 그랬듯이 윅또르 학쑤노비치에게도 그의 성공에 기뻐하는 사람외에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혹시 있었다면 그들에게는 그런 기회가 주어질 틈이 없었다: 80년중에서 50년을 별 문제없이 사업을 한다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다.

그러면 윅또르 학쑤노비치가 도대체 어떤 분인가? 훌륭한 가장이고 충실한 남편 (부인 김 웨라 표도로브나가 유감스럽게도 이미 남편의 곁을 떠났다) 이며 두 명의 …자식들 (그들은 다 대학을 필하고 마음에 드는 직업을 전공했다)의 아버지이며 손자 여섯과 증손자 셋을 거느린 할아버지이다. 그에게는 정부 표창도 수다하다. 소련시대에 성실한 로동에 대해 <영예표식>훈장을 받았으며 카자흐스탄과 한국 정부 표창도 있다. 윅또르 학쑤노비치는 그중에서도 <카자흐스탄공화국 공훈일군>칭호를 가장 소중히 여기고 있다. 왜냐 하면 카자흐스탄 초대대통령 누르술탄 아비세비치 나사르바예브가 그것을 수여하면서 축하하였기 때문이다. 윅또르 학쑤노비치는 카자흐스탄의 고려인들 중에서 상기 칭호를 받은 첫 사람이다. 지금은 그런 명칭을 받은 고려인들이 많다. 카자흐스탄 독립의 벽두인 1994 년에 동료들의 축하를 받으면서 앞으로 할 일이 태산같으니 그 칭호를 우연히 받은 것이 아니라 받을 자격이 있었다는 것을 헌신적 노동으로 확증해야 하는 것을 이해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팔걷고 일에 달라붙었다. 그 시기에 모든 면에서 어려움도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사회사업도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 카자흐스탄고려인협회가 형성되었다. 니 윅또르 학쑤노비치와 마찬가지로 활동력 있고 비즈니스에서 튼튼한 자리를 잡고 있으며 목적지향성 있는 고려인들이 고려인 사회사업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윅또르 학쑤노비치는 <고려인의 집>건설 구상을 두 손으로 받들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민족춤의 아름다움, 민족전통과 문화를 시위하는 고려인 배우들의 순회공연을 지원하였고 물질적 지원이 필요한 원로들도 도왔다.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물질적 부를 달성하기 어려운 직업이 많습니다 – 윅또르 학쑤노비치가 이야기 한다 – 나는 예술을 념두에 두는 것입니다. 때문에 가능한대로 항상 배우들을 도와주려고 노력했습니다. 

윅또르 학쑤노비치는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한 때 공화국 신문에 게재된 기사들이나 문헌들을 소개한다: 말은 유력한 논거가 아니며 80세에는 해 놓은 사업을 보고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직업적 면에 대해 말한다면 국가강령 <주택-91>을 해결할 때 나라의 건설장이 필요를 느끼지 않도록 (윅또르 학쑤노비치가 공화국 차관의 직책과 비교할 수 있는 직책을 차지한 때가 있었다)하기 위해 구 소련의 거의 모든 공화국을 다니면서 경험을 쌓은 적이 있었다. 카자흐스탄 스포츠맨들의 생활과 스포츠연맹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기에 35개 나라를 가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처음에 중경기연맹 회장이였고 그 후에는 아시아 중경기연맹 부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씨름선수, 중경기 선수, 권투선수들이 경기에 참가하도록 일을 조직하여 돈도 좀 벌었다.

-윅또르 학쑤노비치가 중경기를 좋아하는 것이 우연한 일이 아닌것 같은데요? – 우리가 질문했다.

-저는 원래 스포츠맨들을 존경합니다 – 그가 대답한다 – 스포츠선수가 큰 결과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많이 노력해야 합니다. 스포츠선수가 올림픽에서 승리를 따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에 비하면 내가 하는 것이 큰 일이 아닙니다. 그 시기에는 카자흐스탄의 중경기 선수들에게 지어 제대로 된 금속봉도 없었다구요. 그런데 재능있는 중경기 선수들은 많았거던요. 내가 도와주어서 결과도 보았습니다. 우리가 그저 조건을 조성하여 주었지요, 그러니 선수들이 승리를 쟁취하고 돌아왔습니다. 스포츠에는 도움이 항상 필요합니다, 백방으로 지원해 주어야 합니다. 저도 소년 때에 스포츠를 했는데 작은 농촌에는 트레이너가 없으니 꿈을 실현하지 못했어요 – 자신이 못했으니 올림픽의 고봉에 오르려는 선수들을 도왔지요. 그런데 내가 지금 스포츠와 연관된 사업과 거리가 멀어졌지만 스포츠와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 그저 교제하기 위해 우리 클럽을 찾아오는 것이 반가운 일입니다. 얼마전만 해도 지금 기자선생이 앉아있는 자리에 카자흐스탄 공훈트레이너 니 알렉세이 겐나지예비치가 앉아있었습니다.

니 윅또르 학쑤노비치가 스포츠 외에 배우들의 직업에 관심이 큰 것이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는 노래를 썩 잘 부른다.

-예, 저는 노래를 부르기 좋아합니다 – 윅또르 학쑤노비치가 회상한다 – 그런데 성악전문 지식은 없구요. 그런데도 <고향>합창단 단장 신 블라지미르 일리츠의 찬사를 들으니 좋던데요…

고려인들이 잘 알고 있는 가수 니 꼬마 꼰쓰딴찌노비치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윅또르 학쑤노비치는 아주 재능이 있는 분입니다. 자연은 그에게 배우의 많은 품성을 주었는데 그는 경제를 택했지요. 그런데 윅또르 학쑤노비치는 타고 난 소개자 (따마다)입니다. 얼마나 많은 결혼식과 환갑잔치를 치르었는지 아십니까? 나는 그가 훌륭한 소개자라는 것을 수차 확인했습니다.

카자흐스탄공화국 인민배우 김 림마 이와노브나가 회상한다:

-그 분은 우리 <비둘기>무용단을 항상 지원했습니다. 그의 지원이 없이는 우리가 여러 축제에 참가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저의 남편인 공화국 공훈배우 김 블라지미르 가수의 친구였습니다. 한번은 오페라극장에서 나폴리 가요 <아가씨들이여, 말 좀 해 주세요…>를 이중창으로 불러 관람자들의 대 환영을 받았지요. 그런데 관람자들은 두 가수중 한 분이 직업적 가수가 아니라는 것을 몰랐단 말입니다. 저의 남편이 돌아가셨을 때도 모든 소비를 다 그 분이 담당했어요, 나는 그 공을 평생 잊지 않을 것입니다…그리고 저의 주년일을 맞이했을 때도 윅또르 학쑤노비치가 도와주었어요. 레르몬또브명칭 극장 임대비만해도 어머어마했으니까요…

-윅또르 학쑤노비치, 이젠 80세인데 무엇을 하시나요? 고기잡이, 소풍 아니면 친구들과 만나십니까? 

-그것도 있구요, 또 고향에 가면 친구들과 꼭 고기잡이를 갑니다. 그러나 일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을 수도 없습니다. 나는 여전히 <도스따르 및 꼬>무역생산 회사의 이사장입니다. 때문에 은퇴하려고 서둘지 않습니다.

우리는 80세의 윅또르 학쑤노비치에게는 직장외에도 할 일이 많다고 생각했다. 그는 일년에 여러 번 발하스연안의 향촌 꾸이간을 다녀온다. 이 촌의 한 거리를 윅또르 학쑤노비치 아버지의 성명을 따라 니학순이라고 칭한다. 그의 아버지는 일생을 향촌의 꼴호스에 바쳤다. 결국 이 곳에 안치되어 있다. 동향인들은 그를 기억하고 존경한다. 그들은 니학순의 자식들이 이 곳에 오면 항상 반갑게 받아들인다. 니학순은 지식이 없었지만 꼴호스를 지도하면서 향촌주민들에게 무엇이 필요한가를 잘 알고 있었다. 우리가 직업선택에 대한 질문을 하니 윅또르 학쑤노비치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문제는 꿈에 있는 것이 아니고요 저의 부친은 원래 지도자의 소질을 타고 태여났습니다. 지도자의 모든 품성을 자연이 주었다고 말할 수 있지요…그러지 않고는 지도자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지식이 있었더라면 계속 앞으로 나갔을 것입니다. 그 때 나는 꼭 공부를 하겠다고 다짐했지요. 유능한 교사들이 일하는 나라의 가장 우수한 대학에서 공부하고 싶었습니다. 끼로브명칭 카자흐국립대 경제학부가 그런 대학이였습니다. 로동교양에 대해 말한다면 아버지가 로동에 대한 태도의 모범으로 되였습니다.

-개편과 같이 어려운 시기에도 실패도 없이 달성한 성과의 비결이 어디에 있다고 봅니까?

-비밀이라곤 없습니다. 나는 하는 일에서 만족을 얻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나는 마음에 드는 직업을 택하는 사람축에 속하거던요. 그리고 또 한가지는 나는 일을 겁내지 않았습니다. 임의의 일을 시작했으면 완성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나머지는 자식들이 고등지식을 소유하도록 받들어 준 부모들의 공로입니다. 아버지는 사람들에게 인간적으로 대해야 한다고 우리를 항상 가르쳤습니다.

니 윅또르 학쑤노비치는 마음이 너그럽고 솔직한 분이다. 우리는 탄생 80주년을 며칠 앞두고 만났다. 그 카페에는 집에 앉아있는듯한 감이 느껴지는 아늑한 방이 있었다. 

-이 방은 우리의 계보를 상기시키는 클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윅또르 학쑤노비치가 설명한다 – 한쪽 벽에는 카자흐스탄과 세계에 명성을 떨친 니가네 가문의 친척들의 사진들이 걸려있고 다른 벽에는 내가 항상 기대하는 친구들의 사진이 걸려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만나 노래도 부르면서 한가한 시간을 보냅니다.

이 카페에서 만드는 맛있는 요리도 맛보았다. 많은 접대원들이 한국에서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우리는 윅또르 학쑤노비치와 작별인사를 하면서 건강과 새로운 성과를 기원하였다. 

-나는 여러분께 평화와 화합, 복리를 기원합니다. 우리는 오늘 우리에게 있는 것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보십시오, 세계의 곳곳에서 어떤 사변이 일어나고 있는가…평화를 소중히 여깁시다. 나는 여러 나라를 다녀왔습니다. 한국에만 해도 열일곱번 정도 다녀 왔지요. 아이들은 캐나다에 오라고 합니다. 한국에 와서 살며 일하라는 제안도 있어요. 그러나 나는 그 어디도 가고 싶지 않습니다. 카자흐스탄과 맺은 인연이 너무나도 깊기 때문에! 

진 따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