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에서 알마티로. 재일조선인과 고려사람의 문화교류 가능성

2023년 3월 21일부터 28일까지 역사와 문화를 전공하는 일본 연구팀의 일원으로 카자흐스탄 알마티를 방문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소련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끌려간 일본인 병사나 민간인 포로에 대한 조사가 이 연구팀의 주요 목적이었다. 일본인 포로들은 알마티의 구 국회의사당 건설에 동원되었다고 하며 이 곳에서 숨진 일본인들 묘지가 교외에는 있다. 
하지만 나 자신의 관심은 무엇보다도 일본군 포로 속에 섞여 있었던 조선인이나 1937년부터 이 땅에 사는 코리안 디아스포라인 고려사람들이었다. 

나는 일본의 코리안 디아스포라인 ‘재일조선인’(이 말에 대해서는 후술한다)이다. 재일조선인들의 일본 이주사는 일본에 의한 식민지지배가 시작된 1910년대 쯤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조선반도 남반부 출신자가 97% 정도를 차지하고 있었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1945년 8월 15일 이후에도 미소냉전 대립의 영향으로 약 70만 명이 일본에 잔류해 일본 땅에서 대를 이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반도의 남북 분단의 여파로 재일 민족단체들은 반목과 대립, 그리고 분열을 끊임없이 되풀이해 왔다. 재일조선인들에게는 국적 문제도 복잡하다. 일본에서 출생했다고 하더라도 자동적으로 일본 시민권이 부여되는 것은 아니어서 한국적, 또는 무국적과 다름이 없는 ‘조선적’(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의 국적은 아니다)을 가지고 자유롭지 않는 일상을 살 수밖에 없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한국적 보유자라면 한국에 입국할 수 있으나 거기서도 일본에서와 마찬가지로 외국인 취급을 받는다. 우리들의 호칭에도 통일된 것이 없다. ‘재일코리안’ ‘재일한국인’ ‘재일한국‧조선인’ ‘재일’ ‘재일조선인’ 등, 부르는 측의 정치적 입장의 수만큼 호칭이 존재한다. 
나 자신은 재일조선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일본 학술계에서는 이 ‘재일조선인’이라는 말이 ‘재일코리안’과 어깨를 겨누며 거의 정착돼 있다는 사실도 그 이유의 하나지만, 무엇보다도 이 말에는 1948년 이후부터 이어져온 조선반도의 남북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지향한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흔히 오해받고 있는데 ‘조선’이라는 말은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재일조선인’이라는 말에는 일본통치 하에서 깔보는 뜻으로 불리던 ‘조센징(조선인)’이라는 호칭을 일부러 사용함으로써 우리들을 긍정적 주체로 전환시키려는 뜻도 함축되어 있다. 이러한 언어 감각은 바로 고려사람들이 자신의 기원을 남북분단 이전에서 찾는 심정과 공통된 것이 아닐까. 
나는 그 재일조선인들이 일본에서 가장 많이 거주하는 오사카에 있는 오사카공립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으며,  전문 분야는 재일조선인의 문화와 문학이다. 재일조선인들은 ‘본국’인 대한민국이나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그리고 거주지인 일본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조선어나 일본어로 독자적인 문화를 구축해 왔다. 그러나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그 역사가 세세히 연구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나는 오랫동안 제1세대, 제2세대의 작가와 문화인에 대한 구술조사와 일본 각지에 흩어져 있는 자료를 수집해 왔다. 제1세대들이 점점 세상을 떠나가는 가운데 지금 해놓지 않으면 영원히 역사 속에 묻혀 버릴 수도 있다는 초조감을 가지면서 진행해 온 작업이었다. 그 결과물로서 간행한 것이 재일조선인 문학사, 문화 관련 자료집, 재일조선인 여성들의  작품을 모은 앤솔러지 등이다. 
올해 3월 창간 100주년을 맞이한 <고려일보>의 남경자 선생님, 그리고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고려인들에 의한 극장인 고려극장 전 로디온 선생님, 이렇게 존경하는 두 분의 선생님을 만나 뵐 수 있었 던 건 이번 알마티 체류가 가져다준 행운 중 하나일 것이다. 
남경자 선생님은 나우루즈의 공휴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와 주셨고 긴 시간 동안 귀중한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지금까지 사할린과 안산에서 동포 분들에 대한 인터뷰 등을 해 온 나로서는 사할린에서 카자흐스탄으로 건너와 파란만장의 인생을 경험한 선생의 이야기는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전 로디온 선생님도 바쁘신 와중에 일부러 시간을 내주셔 여러가지 재미있는 얘기를 들려주셨다. 고려극장 건물 안에 들어섰을 때는 그 90여 년의 역사의 무게가 느껴져 가슴이 북받쳐 올랐다. 극장 안에 전시된 사진, 프로그램, 허가증, 신문기사, 편지, 초고, 대본, 육필 메모 등 무척이나 귀중한 자료를 실제로 볼 수 있었던 것도 감격스러웠다.
카자흐국립대학 이병조 교수님은 고려일보와 고려극장을 ‘고려사람들의 두 개의 보물’이라고 표현하셨는데 진심으로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화를 키우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경비가 필요한 것도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문화를 창조하고 그것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정열 없이는 아무리 돈이 있다 하더라도 문화를 육성하고 발전시킬 수는 없다. 이러한 것은 재일조선인에 대한 문화연구를 통해서도 절실히 느껴왔던 것이지만, 고려사람들 가운데에서도 이와 같은 문화와 예술에 대한 정열이 몇 세대에 걸쳐 빛을 발해 왔구나 하고 상상해 보면 진심으로 경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 고려사람들의 ‘보물’을 재일조선인들의 언론사나 문화사와 비교하고 관찰함으로써 남과 북이라는 ‘본국’을 개입시키지 않고서도 코리안 디아스포라끼리의 새로운 만남을 창출해 상호 교류와 촉진에 공헌하고 싶다. 이런 꿈이 부풀어 오른 여로였다. 

송혜원 (일본‧오사카공립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