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아시아의 맹주 카자흐스탄에서는 지금, 겨우내 묵은 때를 벗겨내는 대청소가 한창이다. 시민들은 자신의 집안 청소는 물론이고 대문 앞 거리를 쓸고 응달진 담벼락에 남아 있는 잔설을 치운다. 시 당국은 겨우내 중단되었던 도로 물청소를 재개했는데, 아스팔트에 시원하게 물을 뿌리며 지나가는 물청소 차량은 봄이 왔음을 과시하듯 거리를 질주한다.
이런 도시 대청소는 ‘나우르즈(3월 22일)’라고 불리는 카자흐인들의 민속 명절을 앞두고 대대적으로 이루어진다. 혹독한 겨울을 이겨낸 카자흐인들은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춘분을 봄의 전령으로 인식할 뿐 아니라 새해의 첫날로 오래전부터 여겨왔다.
나라마다 다르긴 하지만 음(陰)과 양(陽)이 확장, 수축함에 따라 우주의 만물이 생성하고 소멸한다고 믿었던 유라시아대륙의 동쪽지역(중화문화권) 사람들은 낮이 길이가 가장 짧고 밤이 길이가 가장 긴 동지는 곧 낮이 다시 길어지는 시작점으로 인식하고 새해의 첫날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선조들이 동지를 작은 설날이라고 불렀던 이유이기도 하다.
반면 유라시아대륙의 중앙과 서남부 지역(페르시아 문화권)에서는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바로 이 날을 새해의 시작으로 여겼다. 어디에 기준을 두는 가에 따라 차이가 있을 뿐이지 나름의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근거에 따라 변화의 시작점을 새해 첫날로 인식했던 것이다.
카자흐인들의 봄축제, ‘나우르즈’
이 새해 첫날을 카자흐스탄은 나우르즈라고 부른다. 나우르즈는 페르시아 문화권과 투르크계 민족들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데, 튀르키예는 네브루즈, 우즈베키스탄은 나브루즈, 아제르바이잔에서는 노브루즈, 인도에서는 노우루즈, 이란에서는 노우루즈, 이라크에서는 나우루즈라고 부른다.
이와 같이 명칭은 약간씩 다르지만 모두 ‘새로운 날(new day, 설날)’을 뜻하며 이날을 기해 약 2주에 걸쳐 다양한 의식, 축하 행사, 문화 행사 등을 치른다.
이때 행해지는 중요한 전통 중 하나는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특별한 요리를 먹는 것이다. 새 옷을 차려 입고 친척 어른들에게 인사를 가거나 이웃집을 방문하고 선물을 주고받는다. 거리에서는 음악과 춤이 어우러진 공연이 진행되고, 물 또는 불과 관련된 의식이 행해지며, 민속놀이가 펼쳐지고 수공예품 만들기 등의 행사가 마련된다.
카자흐스탄사람들도 나우르즈를 전후한 3일간의 공휴일 동안 떨어져 살았던 부모와 친지들이 모여 전통음식을 만들어 먹고, 민속 경기를 즐긴다. 마을마다 열리는 대규모 봄축제의 현장은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문화적 다양성과 관용을 가르치는 배움의 장이 되고, 소수민족들도 카자흐스탄이라는 지붕아래 사는 한 가족임을 확인하고 평화와 화합을 다짐한다.
유목민이었던 카자흐인에게 ‘나우르즈’의 첫번째 의미는 ‘봄의 전령’이다. 가축이 새끼를 낳는 계절이 돌아왔다는 것이다. 혹독한 겨울을 이겨낸 유목민들은 자연이 깨어나고, 생명을 가진 모든 만물들이 새롭게 살기 시작하는 ‘나우르즈’를 날 중의 최고의 날이라고 여겨서 축제를 열고 덕담을 건네며 소원을 빌어준다.
두 번째 나우르즈의 의미는 친교이다. 새 옷을 입고, 유목민의 이동식 천막인 ‘유르타’로 손님을 초대하여 인간관계를 회복하는 시간을 갖는다. 이때 겨울에 남은 묵은 고기로 빚는 전통음식인 나우르즈 ‘코줴’를 대접한다. 코줴는 나우르즈 축제에서 가장 중요한 음식인데, 그 이유는 사람들이 이 ‘코줴’를 먹기 위해 서로의 집을 방문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사람들은 말 경주, 폴로와 비슷한 마상경기인 ‘콕파르’, 씨름, 말 타고 달리는 여성을 잡는 ‘크즈 쿠우’ 등의 민속놀이를 즐긴다.
나우르즈의 세 번째 의미는 겨울의 묵은 것을 다 버리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것으로 사람들은 각자의 집이나 마을을 청소하고, 길목을 깨끗이 단장하고 나무를 심기도 한다. 카자흐인들은 카자흐어로 ‘알튼바칸’이라고 하는 그네를 타며 나우르즈 축제를 즐겁게 보낸다.
<나우르즈는 카자흐스탄내 모든 민족의 축제로 승화되었다. 사진은 카자흐인들의 이동식 천막인 ‘유르타’에 초대된 각 민족대표들이 카자흐 전통음식을 함께 나누고 있다>
축제의 꽃, 음식과 음악
축제의 현장에서 빠질 수 없는 건 바로, 음식… 그중에서도 나우르즈 코줴는 첫째로 꼽힌다. 이 음식은 요구르트의 원형격인 케피르와 우유, 벼와 같은 통곡물류, 건포도와 같은 견과류 그리고 말고기를 잘게 찢어 넣고 만든 수프이다. 맛은 다소 시큼하고 말고기 향이 나기 때문에, 한국인의 입맛에 다소 맞지 않을 수 있으나 그 맛에 한번 빠지면 헤어나기 어렵다.
<나우르즈 축제기간 중 유목민의 천막 ‘유르타’에 초대된 손님들에게 돔브라 연주를 들려 주고 있다.>
축제에서 빠질 수 없는 두 번째 요소는 음악… 카자흐인들의 영혼이 담긴 돔브라를 든 수백명의 청년들이 축제가 벌어지는 광장에서 연주하는 장면은 입을 딱 벌어지게 만든다. 그 어떤 북소리보다 그 어떤 화려한 군무보다 더 심장을 띄게 만드는 것이 이것이다. 돔브라는 몽골의 덥쇼르라는 악기처럼 두 개의 현으로 되어있고 연주 방법은 기타와 비슷하다. 지금도 국경일이나 가정의 대소사 또는 학교행사때에도 어김없이 연주되는 것이 바로 돔브라이다. 돔브라를 이용한 공연예술을 "돔브라 큐이라고 하는데, 유네스코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나우르즈 축제의 한 장면. 카자흐 전통의상을 입은 남성들이 팔씨름을 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1926년부터 1988년까지 소련이 집권한 기간 동안 카자흐스탄에서는 나우르즈를 기념하지 않았다.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85년 집권하고 추진했던 개혁과 개방정책의 영향으로 나우르즈 명절을 다시 지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3일 연휴로 지정된 것은 2009년에 와서야 시작되었다. 나우르즈는 2009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에 등재되어 유엔이 지정하는 공식 기념일이 되었다.
김상욱 고려문화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