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에 이바지한 삶

동쪽에 낮은 산, 서쪽에는 강을 이고 선 먼 사할린의 니꼴라옙까 부락에는 주로 <뻬레왈>목재소 벌목공 가족들이 살고 있었다. 영화도 한달에 한번 정도 구경할 수 있는 터이라 문화생활에 대해서는 말할 여지도 못되었다. 때문에 일년에 한번 정도 오는 조선극장 순회공연은 이 곳 주민들에게 있어서 무더운 날에 목을 적시는  한 목음의 시원한 물이나 다름 없었다. 

이른 아침부터 학교 운동장의 한 쪽에 임시노천무대를 만들기 시작했다. 특별히 만든 좌석도 없고 누구는 작은 걸상을 집에서 들고 나오고 누구는  널 판, 휴지를 깔고 앉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애타게 기다렸던 연극을 구경하는 것이였다. 고전작품들인 <심청전>, <춘향전>, <장화와 홍련전> 그리고 사랑 이야기 <이수일과 심순애>를 주민들은 눈물을 훔치며 구경하였다… 이것은 50년대 말에 어린 우리들의 기억에 남은 조선극장이였다. 그후에 에스트라다 배우들도 사할린 주를 순회공연하였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조선극장도 발전하여 갔고 극장집단에 흘러드는 젊은 배우들은 원로들이 닦아놓은 전통을 당당히 이어나가고 있다. 오늘 우리는 얼마전에 문화 및 예술 일군의 날에 카자흐스탄공화국의 고상한 표창인 <바르스>훈장을 수여받은 원로배우  리 올레그 사프로노비치에 대해 이야기 하려고 한다. 

-올레그 사프로노비치, 극장과 인연을 맺으려는 꿈이 있었나요?

-전혀 없었습니다. 저는 과목중에서도 물리를 좋아했고 전기기술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 올레그 사프로노비치가 말한다.
향학열이 높고 호기심이 많은 올레그는 여섯살이 되여 이미 읽고 쓰고 그리 어렵지 않은 산수문제도 풀었다. 그리하여 학교를 가겠다고 어머니를 못살게 굴었다. 그래서 어머니가 부득이 올레그를 데리고 교장선생을 찾아갔다. 올레그의 지식수준을 확인한 교장선생은 예외로 올레그를 6세에 일학년에 받았다.

올레그는 중학을 다닐 때부터 삼보, 유도, 농구 등 스포츠 종목에 몸을 단련시키면서 타스켄트 주 경기대회 쳄피온으로 되기도 했다. 올레그 사프로노비치의 말에 의하면 이런 스포츠는 무기가 없는 자위에 중요하다는 것이다.

올레그는 자기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타스켄트 체신대학 전기기술 학부에 입학하기로 했다. 그런데 규칙에 따라 17세에 받게 되여 있는데 올레그의 나이가 16세였다. 그래서 활동력이 강한 한 친척의 도움으로 전기기술 전문학교에 서류를 접수시켰다.
크론스타트에 기지를 둔 발찍해 함대 잠수함에서의 4년간 군대복무가 그의 생활에서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였다. 예술의 소질이 바로 군대복무 시기에 나타났다고 말할 수 있다. 공청원 리 올레그는 소인예술단의 사업에 열심히 참가했다. 그가 유모가 찬 차스뚜스까의 가사를 써서 바야니스트와 공연하면 관람실에는 웃음이 그치지 않았다. 한번은 레닌그라드에서 있은 공연프로에 그들의 종목을 넣었다. 이것은 보통 공연이 아니였다. 유조선을 진수하는 행사에 그당시 당 중앙위원회 총비서 니끼따 세르게예비치 흐류쇼브와 장령들과 고위급 군칭을 가진 사령관들이 참석했다. 유쾌한 차스뚜스까는 흐루쇼브의 마음에 들었다. 더군다나 노래의 내용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것이였다. 흐루쇼브는 그들을 장려하겠다고 약속했다. 다음날 해원들의 긴급소집에 대한 령이 내리자 모두들 무슨 일이 생겼나하여 불안스러워 하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소인예술단 열성자들인 리 올레그와 바야니스트를 장려하여 휴가에 또 10일을 보충한다는 것이였다. 그래서 원래 휴가 45일에 그것을 보태니 55일이 되었다.

리 올레그는 군대에서 복무하면서 레닌그라드 전기기술대학 야간학부를 필했다. 복무하면서 동시에 근 10건의 합리화 제안을 강구했다. 그리하여그는 전자현미경 인지니어 직업을 전공했다.

1971년에 조정구의 적극적 노력에 의해 알마아타 꾸르만가싀 명칭 음악대학의 극장학부에 조선과가 열렸다. 이 조선과에서 미래의 연극배우들을 양성할 과업이 나서고 있었다. 리 올레그는 작문, 소련공산당 역사, 배우연기 입학시험을 성과적으로 치르었다. 조정구, 리함덕, 연성용이 심사위원들이였다. 리 올레그는 극장 및 영화 배우 연기 증서를 받았다.

-영화에 대한 말이 났으니까 말인데요 내가 <시비리 횡단 열차>영화에서 올레그 사프로노비치를 처음 봤거던요, 그 역에 어떻게 초대되었는지요?

-엘도르 우라스바예브 연출가와 맹동욱 연출가가 저를 초대했습니다. 맹동욱 선생은 이미 우리 대학에서 배우연기를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아주 재능이 있는 분입니다. 상기 영화에서 맹동욱이 일본대사의 역을 놀고 내가 그의 경비였지요. 역은 크지 않았지면 좀 복잡했습니다. 내가 스포츠를 한 것이 도움이 되였지요. 영화를 촬영하기 위해 차량을 하나 임대하여 카라따스와 자나따스간 70키로메터의 거리를 앞뒤로 주행했습니다. 이 영화에서 역을 놀기 전에 친기스 아이트마또브 작품 <붉은 수건을 두른 백양>으로 제작한 영화 <나는 텐샨>에서 운전기사의 역을 놀았습니다. 1980년에 <모스필림>영화촬영소가 예술영화 <대양에 남은 사람들>을 제작했습니다. 내가 중국인 어부 완의 역을 놀았습니다. 연출가 빠웰 추흐라이, 주역을 담당한 와짐 스삐리도노브 배우 그리고 나 즉 셋이 다음 해 - 1981년에 소련국가 상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뜻밖의 큰 기쁨이였습니다.
 리 올레그 사프로노비치는 1971-1975년에 영화촬영소에서, 그후 민족의 극장에서 연출가로, 예술지도원으로 일했다. 그러던중에 이름있는 스포츠맨이며 사회활동가인 채 유리 안드레예비치가 1996년에 올레그더러 고려극장에 와서 극장을 발전시키는데 협력하라는 충고를 주었다. 

-올레그 사프로노비치, 배우로 성장하는데 누가 받들어 주었습니까?

-고려극장에 재능있는 배우들이 많았습니다. 리함덕, 박춘섭, 최봉도, 리 니꼴라이 뻬뜨로비치와 기타 원로들이 저의 선배였습니다. 나는 그 분들에게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극장에 대한 말이 나왔으니 극장 지도부에 대해 몇마디 하겠습니다. 극장을 발전시키는데서 지도자의 역할이 아주 크다고 봅니다. 우리 극장의 경우에는 극장장 조정구가 막대한 기여를 했습니다. 그의 꾸준한 노력에 의해 고려극장이 지방의 극장으로부터 공화국 극장까지의 길을 걸어왔으며 결국은 그당시 공화국 수도 알마아타로 이주하여 왔고 극장이 예술발전에 한 공로로 <영에 표식>훈장을 받았습니다. 때문에 조정구 극장장은 거의 40년간 극장을 지도하면서 직원들과 문화성의 동료들 사이에서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로 되었습니다.

그후 극장장의 계주봉을 튼튼히 받아 쥔 니 류보위 아브구스또브나가 25년간 해 놓은 중요한 사업을 그 무엇으로도 재일 수 없습니다. 그의 발기와 꾸준한 사업에 의해 극장이 모국에서 진행되는 축제에 참가하게 되었고 독일, 영국으로 순회공연을 갈 수 있었습니다. 류보위 아브구스또브나는 재정형편이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극장을 계속 받들었고 모국의 배우들과 연계가 활발해진 것도 그의 덕분입니다. 그런데 류보위 아브구스또브나의 가장 큰 공로는 고려극장이 <아카데미>극장이란 최고 권한을 받아 공화국의유명한 극장들과 한 열에 서게 되었고 극장이 시 중심가로 자리를 옮기게 된 것입니다.    

-올레그 사프로노비치, 장래 안해가 될 아가씨와 어디서 만났지요?

-예, 우리가 같은 대학에서 공부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동창생의 관계였습니다. 때로는 한 연극에서 파트너로 역도 같이 놀았구요. 그런데 내가 오뗄로의 역을 놀면서 갈리나가 역을 노는 데스데몬나의 목을 죄이는데 그 녀의 눈길에서 유난히 반짝이는 눈빛을 보게 되였지요…그 때부터 우리의 관계가 그저 함께 역을 노는 파트너의 관계를 벗어났습니다…

-올레그 사프로노비치, 부부가 배우생활을 할 때 집에서는 창작사업에 대한 말을 전혀 하지 않습니까? 아니면 새 역에 대한 의견을 서로 주고 받습니까?

-물론 서로 평가해 주는 것이지요, 부족점이 있으면 충고도 주고요…그러지 않고서야 발전이 있을 수 없지요. 하긴 우리가 한 생을 거의 살아왔으니 경험도 적지 않지만 사람은 일생을 두고 계속 배워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가수의 소질을 타고 난 아들 리 스따니슬라브는 부모들의 자랑이다. 차이꼽쓰끼 명칭 음악대학을 필한 그는  스따니슬랍쓰끼 극장에서 오페라 가수로 근무하고 있다. 2019년에 있은 성악가 축제 때에 모스크바, 상-페테르부르그는 물론 아세르바이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공연하여 우승자리를 차지하였다. 그의 안해 역시 대극장 오페라 가수이다. 올레그 사프로노비치와 갈리나 니꼴라예브나에게는 여섯살짜리 귀여운 손녀도 있다. 손녀를 자주 보지 못해 유감스럽다고 한다.

-올레그 사프로노비치, 젊은 예술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고전작품을 무대에 대담하게 올리되 기본 줄거리에서 지나치게 동떨어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이상 세대의 충고를 항상 귀담아 듣고 세운 목표를 향해 어려움이 있더라도 꾸준히 앞으로만 나가라고 전하고 싶습니다. 
리 올레그 사프로노비치는 최근에 받은 <바르스>훈장외에 2002년에 <쿠르메트>훈장을 받았으며 1998년에 <공훈 예술 활동가>명칭을 받았다. 연극배우인 김 갈리나 니꼴라예브나는 <공훈 문화일군>명칭을 받았으며 <도스띄크 훈장 제 2급>으로 표창되었다.
 

일생을 예술에 이바지하는 이 예술인의 가정에 새로운 창작적 성과를 바라는 바이다.

남경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