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계에서 세운 그 녀의 공로

최미옥 선생은 카자흐스탄의 교육계와 예술계에서 널리 알려져 있는 분이다. 일생을 자라나는 세대의 교육에 이바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교사의 직업을 우연히 택하는 교육자는 오래동안 이 직책에서 근무할 수 없다. 전공한 직업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이들에게 제 자식 같이 대하면서 배려를 돌려야 하며 무한한 인내성이 있어야 한다. 최미옥 선생은 이 모든 품성을 지닌 당당한 교육자이다.

지난 토요일 알마티 한국교육센터에서 고려한글학교 종강식이 있은 후에 최미옥 선생님의 은퇴식이 있었다.
원래 은퇴하는 날은 섭섭하다고 하는데 미옥선생은 그런 분위기를 느끼지 않았다. 학부모, 교사들로 가득 찬 강당은 명절기분으로 들떠 있있다. 어린이들의 밝은 미소, 교사, 학부모들의 따뜻한 축하…

주 알마티 한국총영사관 조지현 영사는 고려한글학교 학생들의 학과성적이 좋은 것은 최미옥 선생의 공로라고 하면서 개근 상을 받은 학생들의 수가 많은 것이 이것을 말해 준다고 했다. 토요한글 학교 전 교사 김영미 선생이 꽃다발을 들고 일부로 찾아와서 최미옥 선생을 따뜻이 축하하였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속담이 있다. 최미옥 선생이 토요한글학교 직을 맡아 10년동안 일하는 동안에 한글을 또박또박 쓰고 배우기 시작하여 이제는 제법 한글을 소유한 아이들이 많다. 그동안 많은 종강생들이 졸업했다. 바로 이것이 교육가의 보람이 아닐까!

…미옥은 보물의 섬이라고 하는 먼 사할린에서 태여났다. 그의 부모들은 조선에서 가난을 이기지 못해 더 나은 살 길을 찾아 일제가 판을 치던 고향 함경북도를 등지고 1938년에 연락선을 타고 안개자욱한 카라후토 ( 사할린 일본명)로 왔다. 가족은 사할린의 서해안에 놓인 우글레고르스크 시에 자리잡게 되었다. 아버지는 제지공장에 취직하고 어머니는 첫 딸애를 데리고 집에서 옷을 기워 조금씩 남편의 봉급에 보태어 생계를 이어 나갔다. 일제가 강점하고 있던 남부 사할린에서 조선인들이 어떤 착취, 불평등 하에 일하면서 살았는가를 모두가 아는 바이니 이 기사에 되풀이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조센진 (조선사람)>들에게 다 일본이름을 주고 지어 아이들에게도 일본이름이 있었다. 미옥이를 미예꼬라고 불렀다. 조선사람들이 일본말만 하도록 강요했다. 1945년 8월에 소련군대가 남부사할린을 해방시킨 후에라야 조선사람들이 허리를 펴게 되었다… 
자지방에서 7년제 학교를 필힌 미옥이는 주 소재지 유즈노사할린스에 사범전문학교 ( 러시아과, 조선과)를 개교한다는 광고를 보고 그 곳으로 가기로 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의 직업이 원래 미옥이의 마음에 들었다. 여아이들이 모여서 그당시 유행이였던 학교놀이도 자주 놀았다. 한명이 선생님의 역을 놀고 나머지는 학생들이였다. 종이장을 작게 오려 공책을 만들어 나누어 주고 거기에 숙제도 썼다. 물론 점수도 매겼다. 선생님의 역은 차례로 바뀌였다. 일반학교나 차이가 없었다. 그저 범위가 작았을 따름이다. 필자역시 어렸을 때 학교놀이를 자주 놀았다…

최미옥은 사범학교에서 공부했던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고 한다. 러시아반과 화목하게 지냈으며 재능있는 학생들로 형성된 예술단은 방학에 사할린의 여러 도시들을 순회공연하면서 대 환영을 받았다. 이 예술단을 음악교사 전두환과 성악교사 한 갈리나 하리또브나가 지도했다. 갈리나 하리또노브나는 러시아어를 가르쳤다. 그후 수십년이 지나 미옥은 그를 알마아타에서 다시 만났다.

사범학교를 졸업한 미옥이는 구역소재지 돌린스크시로 파견되어 소학반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바로 여기에서 그는 자기의 배필 로중석 청년을 만났다. 똠스크전기공업대학에서 공부하던 그는 자기 조카를 데리려 학교에 들렸을 때 우연히 미옥이를 만난 것이다. 나무랄데 앖는 미남과 미녀의 만남이였다. 

똠스크대학을 필한 남편은 알마아타 중기계공장으로 파견을 받아 카자흐스탄의 수도로 오게 되었다. 그 때 젊은 부부는 이미 귀여운 딸애를 자래우고 있었다.

딸애가 좀 자라자 미옥이는 남편이 일하는 공장에 제도사로 취직했다. 교사로 일할 마땅한 일자리가 없었다. 그러던 중에 <레닌기치>신문사가 크슬오르다에서 알마아타로 이주하여 왔다. 기자들이 부족하였기에 한글을 알고 있는 직원들을 모집한 것이 당연한 일이다. 이렇게 미옥이가 신문사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성격이 쾌활하고 대담한 미옥이에게는 극복하지 못하는 장애물이 없었다. 공업부에서 근무하였기에 대 기업소들로 출장을 많이 다니게 되었다. 미옥이에게서는 <가지 못하겠습니다, 또는 하지 못하겠습니다>라는 답을 들을 수 없었다. 소련에서 명성을 떨쳤던 까라간다 마이꾸둑스까야 탄광 지하막장 400미터까지 안전모를 쓰고 내려가는 것이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쉬운 일이 아니다. 40여년 전이였으니 탄광 막장의 조건도 지금과 비할바 없었던 것은 물론이다. 탄광 행정부가 지하막장에 내려가지 말라는 충고도 기자에게 주었지만 미옥이는 직접 자기 눈으로 보고 쓰는 기사가 실감있다는 알고 들어가겠다고 고집했다. 결국 신문지상에 탄부들의 어려운 로동의 나날을 그리는 좋은 기사가 나타났다…

최미옥은 고려말 라디오 방송기자로도 근무했었다. 그러나 결국은 운명이 그가 전공한 직업에로 되돌아오게 하였다. 김 게르만 교수의 추천을 받아 그는 카자흐국립대 동방학과 한국어과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다. 최미옥 선생께서 한글을 배운 많은 학생들이 현재 한국어 사용과 연관된 여러 분야에서 근무하고 있다. 예를 들어 … 한국어를 수십년간 가르치는 과정에 그의 경험도 풍부해졌다. 최미옥 교사가 집필한 교육용 교재가  한글을 배우는 학생들에게 있어서 훌륭한 참고서로 되어 있다. 최미옥 선생과 여러해 동안 함께 한국어를 가르치는 이병조 교수는 동료의 표창에 기뻐하면서 아래와 같이 말한다:

-그동안 카자흐국립대에서는 최미옥 선생에 의해 수권의 교육용 교재가 집필되었고 교육 및 학술 세미나도 진행되어 왔으며 해마다 약 30여명의 학도들이 배출되는데 큰 기여를 해 오는 등 한국어 교육과 보금에도 지대한 공헌을 해 왔습니다. 그 녀의 노력과 헌신이 있었기에 초창기 한국학과의 기틀이 잡힐 수 있었고 카자흐스탄에서 한국학 발전으로도 이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최미옥 선생은 고려한글학교뿐만 아니라 카자흐국립대 한국학과의 기쁨이자 영광입니다. 
최미옥 선생에게는 한국 내무총리 표창도 있고 카자흐스탄정부 표창도 여러개가 된다. 

최미옥 선생이 고려인 사회계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다고 이상에 쓴 것이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는 <고향>민족합창단에서 수년간 노래를 부르면서 고객들에게 기쁨을 선사하였다. 미옥이는 바로 그 합창단을 조직할 때 사할린 사범학교 교사 한 갈리나 하리또노브나를 다시 만나 함께 합창창단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부부가 곱게 키운 딸 레나는 레닌그라드 ( 상-페테르부르그) 즈다노브 명칭 대학 동방학부 일어과를 필하고 가정을 이루어 런던에서 일하며 거주하고 있다. 귀여운 손녀도 있다. 레나는 <아르부스>배달회사를 통해 부모들에게 과실이나 맛있는 음식을 종종 배달하여 보낸다.

최미옥은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도 기사를 쓰면서 정든 신문사의 일을 돕고 있다. 

남경자 

존경하는 최미옥 선생님! <고려일보>신문사 사원일동은 탄생 8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항상 건강하시고 하루하루를 밝은 미소로 보내시기를 기원하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