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7월에 쁘로호롭쓰꼬예 전야에서 붉은 군대와 독일 파쇼군간의 대 작전이 있었다. 소련무력의 힘을 다시 시위한 이 땅크작전은 위대한 조국전쟁에서 전환기로 되었다. 

적군의 이 격멸작전에 소수의 소련고려인들이 참가했는데 그들은 모든 수단을 다 써서 전선에 나가려고 애썼던 것이다. 그들이 전쟁에 참가한 것은 기적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들중 오직 몇명의 이름만이 우리에게 전달되었으며 나머지는 맹렬한 전투 결과 그들이 해방시킨 땅에 영원히 묻혔다.

1943년 7월 8일에 꾸르스크 궁형에서 19세의 남 니꼴라이 하사가 땅크속에서 불타버렸다. 1943년에 찍은 사진, 부모에게 보낸 편지, 모스크바 부근의 라멘쓰꼬예 시  벨레니히노 역에 있는 합장묘에 세워진 기념비에 새겨진 글 – 이것이 남 니꼴라이가 우리에게 남긴 정보 전부이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그에 대한 추억이다. 이 위대한 전쟁에서 전사한 군인들에 대한 영원한 추억과 기도이다…

남 옥쨔브리 이와노비치는 자기의 맏형에 대해 기억에 어렴풋이 남은 것만 이야기할 수 있었다. 누구보다도 어머니가 아들의 죽음을 심하게 체험했다. 아물어들지 않은 어머니의 상처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아버지 남 이완도, 자식들도 무서운 비애에 대해 어머니에게 상기시키지 않으려고 애썼다. 세월이 흐르고 전사한 아들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  부모들도 세상을 떠났다. 우리가 미쳐 그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한 것이 유감이다…

니꼴라이의 아버지 남 이완 ( 남경팔)은 소련 텔레라디오 방송국 조선말 방송부에서 20여년을 통번역사로 근무했다. 그는 빈농의 가정에서 태여나 1925년까지 조선에서 살았다. 서울에서 중학을 필한후에 블라디보스톡으로 넘어가 처음에는 품팔이를 하다가 다음에 촌 학교 교사로 취직했다. 이완은 원동 국립사범대학 생물학부에 입학하여 3년후에 졸업하고 블라디보스톡에 있는 변강 조선신문 < 아완가르드 > 보도부 부장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1934년부터 남 이완은 루쓰끼 섬에 있는 붉은군대에서 태평양함대 해안 라디오부대 기동당직으로 복무하였다.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에 대해 알게된 그의 지휘관은 자기의 부하를 진심으로 도와주려는 의도로 원동을 떠나라는 충고를 주었다. 그렇게 함으로서 지휘관은 그 후에 벌어졌던 비극으로부터 이완을 구원한 것이다.이완은 < 원동의 국경 지대로부터 고려인들을 강제이주시킬데 대한> 1937년 8월 21일부 소련인민위원회와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결정이 발표되기 몇달전에 모스크바 부근의 라멘스꼬예 시로 이주하여 그 지방에 있는 공장에서 수리공, 선반공으로 일하다가 직장장으로 승진되었다.

또 한 명의 고려인 참전자 강 윅또르 세르게예비치의 운명이 놀라울 정도로 니꼴라이의 운명과 비슷하다.  로켓-박격포군 ( 유명한 까쮸샤)근위대원 무전수인 강 윅또르는 우크라이나 우안을 해방시키면서 쁘라가까지 갔었다. 윅또르의 할아버지도 좋지 않은 일을 감촉하고 강제이주 직전에 11세된 위쨔를 원동국경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모스크바 ( 아버지가 모스크바에서 살고 있었다)로 보냈다.  
 

남 꼴랴도 13세에 모스크바 교외의 주민이 되었다. 후에 그가 전선으로 나가려고 애썼을 때 이것이 결정적 역할을 놀았다. 그는 군사위원회에서 앙케이트를 작성하면서 <출생지> 난에 < 모스크바주, 라멘스꼬예 시, 크라스늬 옥쨔브리 부락>이라고 써 넣었다. 이런 글을 읽어보고 자기 조국을 옹호하려는 청년에게 누가 거절하랴? 필요없는 연상을 전혀 없도록 하기 위해 그는 자기의 성에 <М>자 하나를 더 보태여 모든 공식적 서류에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Намм>으로 되어 있다. < 그는 자기의 민족성에 꺼리낌을 느낀것 같애요, 때문에 조선 성이 독일어 발음과 비슷하게 울리게 썼어요 – 옥쨔브리 이와노비치가 회상한다 – 보십시오, 전선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봉투에 어머니의 조선 성명 남신춘이 아니라  남 엠.이.라고 누이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 전쟁전까지 꼴랴는 순한 아이가 아니였습니다 – 옥쨔브리 이와노비치가 이야기를 계속한다 – 거리에 나가면 주먹싸움질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도 했고 그렇게 함으로서 그를 존대했습니다. 얼마 지나서 그에게 친구들이 나타났다. 그들중 일부와 함께 꼴랴가 전선으로 나갔다.

니꼴라이는 레나와 친했는데 그는 레나의 편지를 전선에서 애타게 기다렸다. 그는 레나와의 우정을 소중히 여겼다. 레나는 그의 가장 가까운 벗인 월로자 체뿌린의 누나였다. 꼴랴는 학교에서 월로자와 한 책상에 앉아서 공부했다. 1942년에 꼴랴는 라멘쓰꼬예의 기타 청년들과 함께 고리끼시 부근에 있는 제르신스끼 명칭 땅크전문학교에서 강습을 다녀 기계공-땅크운전수가 되었다. 레나는 꼴랴의 어머니와 함께 전문학교에 왔다가군 했다. 전쟁시기에 기차를 타고 그 곳까지 가기가 얼마나 어려웠던가를 말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전선으로 떠나기전에 니꼴라이가  라멘쓰꼬예에 있 는 집에 두시간쯤 들렸었다. 그 때 어머니도, 마이야 누나도, 남동생도 이것이 마지막 만남이였다는 것을 그 누구도 몰랐다. 옥쨔브리 이와노비치는 전선으로 떠나는 젊은 니꼴라이를 기억에 새겼다…

니꼴라이가 전사하기 한달전 즉 1943년 6월에 첫 편지이자 마지막 편지인 오직 한 통의 편지를 집에 보냈다: 
< 귀중한 친척들이여, 안녕하세요! 나는 건강하게 잘 지냅니다. 우리에게 새 군복을 내 주었고요, 식사도 잘 합니다. 나는 사샤 셀로마노브와 같이 복무하는데 워와 체뿌린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날마다 훈련도 하고 배우기도 하면서 프리쯔들을 까부시라는 명령을 기다립니다. 저에 대한 소식은 이것뿐이고요… 어머니, 아버지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집에 계시지 않고 어디로 떠났다면 주소를 보내주세요. 건강은 어때요? 집안은 다 무사하나요? 마이야와 옥쨔브리는 어떻게 공부합니까? 필요한 것이 있으면 쓰십시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해 드릴테니까요. 저 걱정은 하지 마시고 어머님과 동생들의 건강에 조심하십시오.

이웃에 다 안부전하고 레나에게 나의 주소를 전해주세요. 어머님, 오랫동안 소식을 전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시간이 부족합니다. 이것으로 끝내겠습니다.

안녕히 계셔요, 아들 꼴랴. 다음 편지에 더 자세히 쓰겠습니다.
모두와  굳게 악수합니다. 1/V1-43년. ( 싸인)
어머님과 레나에게서 회답을 기다리겠습니다.>.
1942년 9월에 붉은 군대에 징병된 남 이완을 처음에 지어 기관총중대에 소속시켰다. 다음 민족성의 원인으로 모스크바에서 추방하여 쎄끼노 시에 있는 <뚤라우골리>트레스트 제 18호 탄광의 로동전선에 보냈다. 아버지는 즉시 아들에게 편지를 써 보냈다. <1943년 6월 23일. 귀중한 아들아 안녕!금방 집에서 편지를 받았다, 그래서 네 주소를 알게 되었어. 꼴랴야,  어떻게 지내니?  적군과의 싸움에서 성과는 어때? 나는 사랑하는 소베트조국이 네게 베푼 신임에 보답하리라고 확신한다. 사랑하는 아들아, 가증스러눈 파쇼놈들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까부셔라 – 이것은 아버지가 네게 또 한번 주는 훈시란다!  
꼴랴, 넌 왜 집에 오래 소식을 전하지 않느냐? 어머니가 너의 편지를 날마다 애타게 기다리지 않아, 엄마와 내게 답을 빨리 써

보내라구!

꼴랴야, 편지를 받아보니 집안은 다 무사한것 같구나, 5월 28일에 앓게 된 옥쨔브리가 다 완쾌되어 6월 16일에 퇴원했단다. 너의 회답을 받아본 후에 즉시 답을 쓸게.

꼴랴, 나의 건강상태는 좋고 일도 잘 하고 있어…우리 걱정은 하지 말어, 잔인한 적군을 하루 바삐 격멸할 생각만 해! 
전투에서 성공을 바란다! 회답을 속히 써서 보내라구>. 
그런데 꼴랴에게 이 편지가 전달되지 못했다…< 배달할 수 없음. 1943년 7월 12일>이라고 써서 편지가 쎄끼노로 되돌아왔다.

운명의 희롱이라고 할까 – 꼴랴는 그렇게 기대했던 첫 전투에서 전사했다. 남 니꼴라이 이와노비치 하사는 꾸르스크 주 벨레니히노 역 부근에서 있은 땅크전에서 1943년 7월 8일에 전사했다. 

모스크바 교외의 라멘쓰꼬예  시에서 함께 지내던 꼴랴의 동향인이자 제르진스키명칭 땅크전문학교 동창인 아나똘리 세도브는 꾸르스크궁형 전투에서 다리를 하나 잃고 돌아왔다. 그 날 아나똘리는 격파된 소련땅크들을 전장에서 꺼내라는 명령을 받았다. 바로 아나똘리가 꼴랴가 어떻게 전사했는가를 이야기 하였다. 그의 땅크는 휘발유로 작동되는 가벼운 것이였다. 독일군에 의해 추격된 그런 땅크는 불에 잘 탔다. 세도브는 화상을 입은 꼴랴를 훨훨 불에 타는 땅크에서 끄집어 내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생명을 구원하지는 못했다. 세 명의 승무단이 다 전사했다.

재봉직장에서 일을 끝내고 돌아 온 어머니가 전사공보를 받고 가슴이 터지듯 소리치던 일이 기억에 남았다. < 당신의 아들 기계공-땅크운전수 남 니꼴라이 이와노비치 하사 (모스크바주, 라멘스꼬예 시, 크라스늬 옥쨔브리 부락 23동, 23호)는 사회주의 조국을 위한 전투에서 군사선서에 충실하였으며 전투과정에 영웅성과 대담성을 발휘하면서 전사하였음…>.
아들의 죽음은 어머니의 건강을 해쳤다.

< 저 걱정은 하지 마세요, 건강에 조심하고 형제들의 건강도 보살피세요> - 오직 한 통의 편지에 남 니꼴라이가 이렇게 썼다…

니꼴라이가 묻혀있는 합장묘를 오래동안 누구도 찾지 않았다. 아니, 부모들은 그 묘를 찾기를 두려워 하였다. 전쟁이 끝난후 수년이 지나서야 옥쨔브리 이와노비치의 안해 따마라 그리고리예브나가 꾸르스크 주 벨레니히노 역에 갔을 때 바로 플렛홈 건너편 합장묘에 세워진 기념비를 보았다. 거기에 새겨진 성명들 중에서 <남 엔.이.>라는 짧은 성을 읽었다.
그들의 위훈은 우리의 역사이다. 전장에서 전사한 군인들이 묻힌 곳을 옛날부터 신성한 곳으로 간주했다. 그중 어떤 묘들은 유감스럽게도 흔적이 없이 사라졌다. 레닌그라드 주 엠게아 역 근처의 합장묘는 이미 전쟁시기에 닦아서 평지로 만들었다. 바로 그 곳에 기가이 니꼴라이가  묻혀있었다. 이 땅은 여러번 이 손에서 저 손으로 넘어갔었다. 1943년 5월 6일에 아나빠 지역의 흑해 상공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해상항공 폭격기 항법사, 모스크비종합대학 졸업생 한 겐나지가 격추되었다. 친척들과 가까운 사람들은 그저 검푸른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에 꽃다발을 던진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신성한 곳이 있다. 우크라이나의 월릔스크 주 루꼬브 부락의 합장묘에 소련영웅 민 알렉산드르가 묻혀있다. 모스크바의 워스트랴꼽스꼬예 공동묘지에는 땅크병 최 뾰뜨르 대령이 안치되어 있다. 꾸르스크 주 벨레니히노 역에는 남 니꼴라이 하사가 묻혀있다. 그들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다.

옥쨔브리 이와노비치에게 한해서는 남 니꼴라이가 전사한 날이 가족이 니꼴라이를 추모하는 날로 되어 있다. 그들에게는 이

날이 전승절과 마찬가지로 신성한 날이다.

신 드미뜨리 

P.S. 모스크바 교외의 라멘쓰꼬예 시에서 전선으로 나간 22명의 청년들중 4명만이 집으로 돌아왔다.
레나 체뿌리나는 아직까지도 라멘쓰꼬예 시의 중심에서 살고 있다. 그 녀는 자식들을 다 키우고 지금은 손군들을 돌보고 있다. 꾸르쓰크궁형전 주년일에 옥쨔브리 이와노비치가 레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남 꼴랴에게 대한 말을 꺼내자 그 녀는 말을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