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의 년대기를 쓴 기자들

해빛찬란한 5월이였다. 타스켄트해 부근에 자리잡은 별장들에서는 푸른 나무잎들이 바람에 설레이고 라이락과 구즈베리 꽃들, 또이쩨빠도로를 따라 늘어선 벌집들에서 풍겨오는 향내에 머리가 핑 돌것만 같았다.

이미 약속한대로 아침 11시에 김씨네 별장에 모였다. 솔직히 말해서 꾸일류크 시장에서 시간을 얼마간 잃었다. 우리 <남아들>의 모임에 필요한 식품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모인 사람들은 남아들이 아니라 머리에 서릿발이 내린 중년의 노인들이였다. 

승용차 두 대가 거의 동시에 목적지에 왔다. 안 윅또르는 낑낑 거리며 브루트 차의 짐함에서  낡아빠진 세다리 흑백색 사진기, 멋진 일제사진기에 사용되는 여러개의 렌즈, 조립식 의자, 해볕보호 블렌드 기타 많은  장비들을 꺼내고 있었다. 사진작가 윅또르는 이런 행복한 순간을 그저 보내지 않기로 했다. 하긴 언제 또 이렇게 만날런지 누가 알 수 있으랴? 위쨔는 <고려일보>타스켄트 전 기자주재소 기자들이 만난 이 별장에서 원로-동료들의 모습을 마음껏 사진기에 담기로 했다. 우리는 분주한 도시를 떠나 시외의 이 조용한 곳에서 다스따르한에 둘러앉아 재미있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하루를 보내기로 했다…

짐도 채 부리기 전에 윅또르는 멋진 장면을 포착하려고 별장 부락을 앞뒤로 뛰여다녔다. 그런 때면 위쨔는 자기의 나이도 느끼지 않는것 같았다. 하긴 그가 달리 일할 줄을 몰랐다. 우리가 <레닌기치>주재기자들이였던 30-40년전에 우리는 자주 타스켄트주 경리들에 자주 나갔던 일이 회상된다. 윅또르는 그 때도 농민들의 집 마당을 열심히 돌아 다니면서 후에 그의 사진레포르타즈의 중심으로 될 오직 하나의 장면을 찾아 헤매었다. 그렇게 촬영한 많은 사진들이 오늘 만 사람의 높은 평가를 받는 유일무이한 명작으로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나는 지난 세기의 80년대 말기에 고르바쵸브 <개편>의 신선한 바람에 취한 김 브루트가 신문사의 과업을 받아 고무감에 휩싸여 날카로운 비판기사를 썼으며 기자로서 대폭적인 조사도 하던 일이 기억에 떠올랐다. 그 때는 전반적 공개성, 생활에서 부정적 현상에 대한 사회적 비타협성의 시기였다. 바로 그 시기에 김 브루트는 독자들앞에서 자신을 재능있는 기자로, 더 정확히 말하자면 대담한 기자로 등장했다. 오늘 우리는 김 브루가 <고려신문>주필로 일한 20년이란 긴 세월이 그의 머리에 서릿발을 더 보태고 그와 동시에 노령의 지혜도 보탠 것을 볼 수 있다. 우스베키스탄 고려인 디아스포라의 년대기의 기본 편자로 되기란 영예롭기만 한것이 아니라 아주 책임이 크다는 것도 그는 잘 알고 있다.

소련이 뜻밖에 붕괴되고 <고려일보>타스켄트 기자주재소가 닫기자 주재기자들이 일자리를 잃게 되었다. 앞날이 보이지 않는 혼란속에서 존재하기란 힘든 일이다. 각자가 제 나름대로 살 길을 찾았다. 개편 이후의 그 불안한 시기에도 우리는 왜체슬라브와 함께 도시 주변의 작은 카페에 앉아서 우리의 어려운 사정에 대해 오래동안 담화했다. 물론 우리의 창작계획에 대해서, 호주머니가 비여 있으면 아이디어도 그리 많이 나오지  않는다는 솔직한 이야기도 했다.

그러면 우리가 <김씨네 별장>이라고 칭하는 김 블라지미르 나우모비치 (용택)의 별장에 대해 몇마디 쓰려고 한다. 이 조용하고 인적기가 없는 별장을 30년전에 구매했다. 처음에는 별장이 진짜 <천국>과 같았다. 그것은 <나우믜츠>가 이 농촌의 부동산을 응당한 상태에 유지하기 위해 적지 않은 노력을 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직장, 사회사업, 작가활동, 고기잡이에 시간을 보내는 바람에 그 어느 한때 꽃피던 별장이 황패해 졌다. 이제는 따뜻한 봄날이나 더운 여름날에 이 별장이 오늘과 같이 <나우믜츠>친구들과 가까운 사람들이 드물게 모여서 몇시간동안 지난 날을 회상도 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도 나누는 곳으로 되었다. 

공기가 가스로 오염된 거리와 미친듯한 도시의 생활 리듬을 벗어나 이 곳에 오면 자신을 행복한 사람으로 느끼게 된다. 긴장을 완전히 풀고 수영장에서 물장난도 치고 시원한 와인도 한잔 하고 맛있는 음식도 끓여 먹는다… 

오늘은 내가 요리사가 되었다. 내가 쁠로브를 장만하는 동안 친구들이 여러가지 테마로 이야기를 나눈다. 때로는 농담과 함께 웃음소리가 터지기도 한다.나는 동료들을 바라보면서 이제는 우리 모두에게 ( 시인이 썼듯이) <인생의 가을>이 왔다고 생각했다…상에 마주앉아 음식을 먹으면서 누군가가 <언제 또 이렇게 모일 수 있을까>라고 슬픈 기색으로 말했다. 낙천성이 끓어넘치는 김 월로자가 감격한 어조로 말했다: <하하, 그것 무슨 소리야?! 쓸데없는 생각을 버려!>

현명한 한 철학가가 말했다: <역사에 빠져 들어갈 수도 있고 역사에 기입될 수도 있으며 역사 자체로 될 수도 있다>. 이 동료들이 이미 역사에 즉 우리 고려인들의 역사의 년대기에 기입되었다고 확언할 수 있다. 그들이 특별한 사람들이거나 하나님께서 지나치게 큰 재능을 받아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저 한번은 마음과 심장의 부름에 따라 디아스포라의 년대기를 쓰는 쉽지 않은 짐을 어깨에 올렸다. 그들은 한번 선택한 길에서 탈퇴하지 않고 <인생의 가을>까지 영예롭게 걸어왔다. 알맞는 정도로 재능이 있는 그들은 수십년을 내려오면서 우리 공동의 디아스포라의 모사이카 쪼각을 하나하나 모았다. 문학작품과 기록 서적, 기사들과 사진작품에 표현된 그들의 창작이 영원한 정신적 유산으로 후손들에게 남을 것이다.  

   리 블라지미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