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니꼴라이 니끼포로비치 – 화학공장 지배인, 조선인민군 장군

타스켄트 고급당학교에서 작성한 소련공산당 당원 (당증 번호 08991786) 등록카드에 의하면 장 니꼴라이 니끼포로비치 (…)가 1914년에 가난한 한인 이주민 가정에서 태여났다. 장 니꼴라이는 쁘리모리예변강 포시예트구역 노바야 촌에서 탄생하였는데 이 촌을 첫 한인 농촌들인 지진해와 양치해 한인들이 1878년에 설립했다. 한인들은 노바야 촌을 주리해라고 칭했는바 이 촌이 주리해 (중국명)강안에 놓였다고 해서 그렇게 불렀다. 러시아명은 이상에 지적했듯이 노바야 촌으로 남았다. 짜리 관리 엔.엔.나세낀의 보고에 의하면 촌협회가 1895년에 작은 학교를 세웠고 역시 그가 전한바에 의하면 1891년에 106개의 농가에 한인농민 509명이 거주하였다.

장 니꼴라이 (장철)의 생년월일이 어긋난다. 장학봉은 자기의 책에 장철이 1914년 9월 20일에 쁘리모리예변강 포시예트구역 노보끼옙스크 (노보끼옙스꼬예) 에서 태여났다고 쓰고 있다.

아마 이 오체르크의 주인공이 노바야 촌에서 태여나 이곳 촌 학교를 졸업했다는 것이 옳은것 같다. 다음 니꼴라이가 포시예트구역 행정중심지인 노보끼옙스꼬예 사범학교 졸업증을 받고 1932-1934년에 사범전문학교 교육과정을 완전히 필했다. 1936년 5월에 노보끼옙스꼬예를 크라스키노로 개칭했다. 훈춘 하산구역 국경초소를 일본침략자들로부터 방어하는 전투에서 전사한 미하일 크라스낀 중위를 기리여 그렇게 개칭한 것이다.

장 니꼴라이는 사범전문학교 졸업증을 가지고 노보끼옙스꼬예에서 한 학년도를 소학반 교사로 일한후에 교장으로 근무하였다. 알지 못하는 원인으로 그는 교장의 직책을 두고 바라바스촌 불완전 중학교에서 상급삐오녜르 지도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강제이주 직전에 장 니꼴라이는 전연맹레닌공청동맹 구역위원회에서 삐오녜르부서를 지도했다. 혹시 이것이 1932년에 니꼴라이가 공청동맹에 입맹하여  조선청년 사상교양 사업에 파견된 것과 연관이 있었을 수도 있다.
원동의 모든 고려인들과 마찬가지로 강제이주당한 니꼴라이는 타스켄트주 깔리닌구역에 배치되어 첫 학년도에 두마스치 꼴호스 중학교 교원으로 근무하였으며 다음은 우스베크소베트사회주의공화국 수도주의 중치르치크구역 스웨르들로브명칭 고려인 이주민 꼴호스 중학교에서 첫 두 학기를 교사로 일했다.  

우스베크공화국 깔리닌구역당위원회는 1939년 5월 14일에 장 니꼴라이를 소련공산당 후보당원에 받았고 일년후에 즉 1940년 5월 18일에 역시 상기 구역당위원회가 니꼴라이에게 당증을 수여했다. 위대한 조국전쟁이 시작되기전에 그는 자기 꼴호스에서 문화계몽 사업에 몰두했다. 그리고 장 니꼴라이는 1942년 2월부터 1943년 6월까지 하부치르치크구역 제 2호 농업기계트랙터 스테이션에서 공청동맹 정치부 부부장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1943년 6월에 젊은 당원 장 니꼴라이가 또 출세하였다. 구역당위원회 조직지도부 부장의 직책에 임명된 그는 자기의 실력을 완전히 발휘했다. 구역당위원회는 전망성있는 당 일군을 타스켄트 고급당학교에 파견했다. 장 니꼴라이는 1944년 9월에 학업에 착수했다. 그런데 학습과정을 다 필하지 못했다.  그것은 그의 생활에서 큰 전환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류보관소 자료에는  <1945년 9-11월에 128명으로 이루어진 큰 고려인 그루빠가 중아시아에서 북조선으로 파견되었다고 지적되었다. 그들중 다수가 공산당원들이다. 북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조직뷰로 비서 김일성은 준비된 당간부가 극히 필요한것과 관련하여 조선에 체류중인 아래의 공산당원들을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조직뷰로의 처리하에 보내줄 것을 부탁합니다: 장 니꼴라이 니끼포로비치 (1940년부터 공산당원, 당증 번호 3265720>. (… 폰드 17, 목록 1238, 공문서  55,  5페이지). 북조선에서 근무중이며 조선표창 수여에 추천된 소련고려인들의 명단 (의정서 …83에 첨부된 1951년 7월 31일 – 10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뷰로 결정에는 장 니꼴라이 니끼포로비치가 북조선에서 1945년부터 근무하고 있다고 지적되었다> (14. V111. 51년….폰드 17, 목록 3, 공문서 1090, 163-170 페이지). 장 니꼴라이가 평양에 온 날자는 로련대외정치 문서보관소에 보존된 다른 서류에 정확화되었늠ㄴ바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장 니꼴라이 니끼포로비치 <단철); 출생년도 1914년; 직장과 차지하는 직책: 내각 전권대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에 온 날자: 1945년 12월 4일부터; 가족들의 성명 (부인에 대한 자료만 복사되었음): 김혜숙, 1923년생>. (1952년 1월 1일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기관에서 근무하는 소련공민 고려인들의 명단. 로련대외정치 문서보관소, 폰드 0102, 목록 8, 공문서 51, 문서철 39, 17페이지). 그런데 장학봉의 기록에는 우스베크공화국 군사동원부에 의해 동원된 장철이1946년 초에 북조선에 왔다고 지적되었다.  (장학봉, 566 페이지). 보존된 문서보관소 자료에 의하면 장학봉의 주장이 그릇된 것이다.

장 니꼴라이는 북조선에 온후 제 1 원동 전선 제 25군 …처음에 통역으로 복무했다. 그는 1946년 말기부터 1947년까지 북조선 정부 정치 및 안전 국 부국장으로 일했다. 1948년부터 1950년까지 조선로동당의 파견에 의해 편안남도 철광산지를 지도했다. 

조선전쟁이 시작되었던 초기에 장 니꼴라이는 전선의 후방 부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전쟁이 계속된 3년 기간에 조선인민군에 기자재를 공급하는 이 중요한 분야를 담당했다. 그의 직책을 지적하는 면에서 어긋나는 부분이 있다. 실례로 김 브루트의 책에는 장 니꼴라이가 조선인민군 후방 총 관리국 국장이며 군칭은 대장이였다고 지적되었다 (김 브루트, 170 페이지). 그런데 서류보관소 자료와 거기에 기록된 날자를 본다면 결국 그가 중장으로서 조선인민군 총 사령부 후방관리국  부국장으로 복무했다고 간주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전쟁이 끝난후에 장철 (장 니꼴라이)은 다른 책임적 직책에 전임되었다. 즉 함경남도 흥남시 화학공장 지배인으로 임명되었다. 공장은 농업에 한해서 아주 중요한 비료를 생산하게 되어 있었다. 장철의 지도하에 공잔을 완전히 복구하고 1955년에 가동시켰다. 과업을 성과적으로 수행한 후에 북조선 당과 정부는 장철을 이전 직책 – 조선인민군 총 사령부 후방 부사령관으로 복직시켰다. 장 니꼴라이는 소련에 귀국할 때까지 이 직책에서 복무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1956년에 김일성이 소련과 일부 사회주의 나라들을 역방했다. 귀국한 후에 김일성은 조선로동당 전원회의에서 <양안파벌>대표들의 날카로운 비판을 받았다. 김일성의 정책에 불만을 가진 자들이 소련고려인들 중에도 있은 것이 물론이다. 북조선 지도자를 국가지도자의 직책에서 해직시키려는 계획이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자 곧 당-정부 노멘클라뚜라 사이에서 숙청깜빠니야가 시작되었다. 유명한 소련고려인 대표들도 탄압을 당하게 되었다. 북조선 정체는 크레믈리 사절들이 소련공민권을 거절함으로서 자기의 새 조국과 그의 지도자에 대한 충성을 발휘하도록 할 목적으로 그들에게 압력을 가했던 것이다. 일부 소련고려인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민증을 받았는바 그 결과 그들은 곧 모스크바와 평양주재 소련대사관의 보호를 잃게 되었다.

장철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의 1956년 8월 27일부 278호 정령에 따라 북조선 공민증을 받았다 ( 이중 공민증을 소유하고 있는 자들의 명단. 로련대외정치 서류보관소, 폰드 179, 목록 10…, 공문서 19, 철 1, 러시아어로 된 텍스트 21 페이지, 조선어로 된 텍스트 28 페이지, 1958년 4월 26일).    

박해와 노골적 탄압의 파도가 심해짐에 따라 다수 소련고려인들이 귀국하기를 원했다. 소련 페스포드를 보존한 고려인들은 문제없이 출국할 수 있었는데 그것을 북조선 페스포드로 바꾼 고려인들은 북조선을 떠나기가 힘들었다.  이 원인으로 장철 (장 니꼴라이)은 1958년 10월 26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민권을 벗어날 때 소련공민권을 보존해 달라는 청원서를 썼다. 그 청원서에는 그의 인적 사항, 페스포드 번호 그리고 <장철>이라고 조선글로 쓴 성명이 있다> ( 청원서 텍스트. 로련대외정치 서류보관소, 폰드 179, 목록 10…, 공문서 19, 문서철 1, 83페이지). 그의 부인 김혜숙도 남편의 행동을 따라 같은 청원서를 올렸다.

오랜 합의 끝에 장 니꼴라이가 1959년 말에 끝내 평양을 떠날 수 있게 되었다.그와 함께 그의 가족들 – 안해와 아들 장 와실리가 소련에 귀국했다. 장철은 귀국한 후에 서면으로 보고서를 작성하고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책임일군들과 담화를 하는 등 필요한 과정을 끝냈다. 평양에서 돌아 온 소련고려인들이 모두 다 이런 과정을 겪게 되어 있다. 장 니꼴라이는 타스켄트 고급 당학교로 파견되었다.

장 니꼴라이 니끼포로비치는 학업과 자격향상을 성과적으로 끝낸 후에 우스베크공화국 건설성 당위원회에서 5년을 근무했다. 다음 1968년부터 1977년에 은퇴할 때까지 타스켄트 부근의 벼재배 솝호스에서 당단체 비서로  일했다. 은퇴한 후에 그는 안해, 아들 와실리, 손자 둘과 함께 타스켄트에서 거주하였다. 장학봉의 말에 의하면 1990년대 초에 장 니꼴라이 니끼포로비치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할데 대한 초대장을 김일성에게서 받았다. 평양에서 그에게 경의를 표하여 굉장히 맞이하였으며 장군의 군칭을 수여했다. 그후 그는 초대하는 측의 부담으로 또 두번 휴식하러 평양에 갔었다. 장 니꼴라이 니끼포로비치 (장철)는 1995년 4월 28일에 사망하여 타스켄트에 안치되어 있다. 그의 로동과 군공이 소련 및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훈장과 메달로 지적되었지만 표창수여에 대한 상세한 부분은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남아있다.  

김 게르만 – 역사학 박사, 알-파라비명칭 카자흐국립대 아시아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