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작가 안 윅또르

간단한 전기: 안 윅또르 이와노비치는 1947년에 타스켄트주 프스켄트시에서 태여났다. 전공은 토지개량 수리학자였지만 운전기사, 영화기사, 야채재배업자 등 여러가지 일을 했다. 그는 어린기술자 양성소에서 사진술을 가르치기도 했더. 1979년에 <레닌기치> (현재 <고려일보>) 신문사에 사진기자로 취작하여 일하면서 예술사진 창작에 몰두하기 시작하였다. 1995-2020년 기간에 안 윅또르 사진작가는 일본의 코베와 쿠마모토 도시들, 한국의 서울과 대구, 카자흐스탄의 알마아타시, 우스베키스탄의 타스켄트시에서 4번, 독일의 드레스덴 및 기타 도시에서 자신이 창작한 사진전시회를 열었다. 그 외에도 그는 <카자흐스탄 고려인의 역사>, <유치로 발송>, <고려극장 창립 66주년>  기타 사진앨범 저자이다. 안 윅또르는 우스베키스탄 예술아카데미야 창작회 회원이고 러시아 사진작가동맹 맹원이다. 2007년에 그는 우스베키스탄 미술가아카데미야 은메달을 받았다. 타스켄트시 사회계는 2019년에 재능있는 사진작가의 창작활동 40주년을 성대히 맞이했다.

오늘 현재 안 윅또르는 구 소련의 전 지역에서 인정받는 유능한 고려인 사진작가들중 하나이다. 우리의 수월하지 않은 생활을 묘사함에서 이 사진작가를 따라잡을 사람이 없다. 안 윅또르의 사진들은 우리를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하며 우리로 하여금 <마비상태>에 구속되게 한다. 서울에서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 윅또르의 사진전 (강제이주를 테마로 한)을 본 여러 종합대학 교수들이 물론 응당한 평가를 주면서 물어보는 것이었다.: <사진작가님, 사진전에 전시된 사진들이 우리로 하여금 공포에 싸이게 하는 데 실지에 있어 이 모든 것을 우리 동포들이 겪었다는 말입니까?>. <예, 사실 그랬습니다. 사진들이 증인이지요, 나는 이 사진들을 <잡노라고> 원동의 전 지역, 중아시아, 카자흐스탄, 러시아를 헤맸습니다> - 사진기자가 대답했다…

사진작가의 성장의 길은 수월하지 않았다. 신문사에서 몇년 일한 후에 그는 다른 직장으로 옮겨 자신의 숙명을 찾아보기도 했다. 한 때는 <생산의 사진술>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1988년에 안 윅또르는 <레닌기치>신문사 타스켄트 기자주재소에로 되돌아와서 거의 25년을 근무했다. 보는바와 같이 사진창작을 한번 맛본 우리 <도주자>는 지어 더 높은 봉급을 준다해도 다른 일에 손을 댈 수가 없었다.

그 때는 바로 고르바쵸브 시대였다. 이 시기에 긍정적인 점도 있었다. 지어 사진기자의 직업에도 …있었다. 이제는 착유공을 젖소앞에서 찍거나 핸들을 잡은 운전기사나 슬픈 표정의 환자 곁에 선 의사를 촬영하지 않아도 되었다. 안 윅또르는 여러가지 테마에 따라 사진오체르크를 창작하면서 사진술에서 큰  전진을 하였다. 이 새로운 방향은 적지 않은 힘과 시간, 자금을 요구했다. 그리고 인내성이 필요했던것도 물론이다. 그런데 진실한 투사의 품성이 윅또르에게 적지 않았다. 이상에 지적했듯이 그가 청춘시절에 한 여러가지 일이 그런 품성을 배양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다 그가 원하는 일생의 직업이 아니었다. 어느 날  한번 손에 사진카메라를 쥐였다…그런 <한번>이 워로녜즈의 한 젊은이에게도 있었는데 후에 그는 <꼼쏘몰쓰까야 쁘라우다>지의 유명한 사진기자가 되었다. 와실리 뻬스꼬브는 <이슬을 밟으며>라는 사진책을 창작한데 대해 레닌공청동맹 상금을 받았다. 그런데 운명을 결정짓는 <한번이>있은 후에 우리 안 윅또르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는가? 사진창작 과학의 비결을 알아내고 직업적 고통을 겪는데 많은 세월이 흘렀다. 부지런한 사진작가는 자기 직업을 <달콤한 유형살이>, <자발적 예속>이라고 칭한다. 배우기 위해 완강히 노력했다. 윅또르는  그의 동료들이 부러워할만큼 <날뛰는 사진기자이다>. 그런데 안 윅또르에게는 사진기자들이 부러워하는 또 한가지가 있다. <민족마다에게는 자기의 ….있다>는 명구가 있다. 고려인 소수민족은 수십년을 내려오면서 자기 민족의 년대기를 창작하는 이와 같이 실력있고 부지런한 사진작가가 있는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지난 세기말에 안 윅또르는 <유치로>라는 사진앨범을 창작했는데 명칭 자체로 그는 창작적 신념을 확정했다. 즉 사람들에게 항상 필요한 창작을 약속한다는 것이다. 리 스타니슬라브의 시가 앨범의 서두로 되여 있는데 카자흐스탄 시인은 조선이름이 사라지고 <과거에 대한 질문에 할아버지도 침묵을 지킨다>고 하소연 하고 있다. 흘러간 세월은 윅또르 이와노비치가 약속한 직업적 및 도덕적 의무를 신성하게 수행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의 사진전과 출판물들에 발표된 자료에 의해 고려인들의 비극적 과거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고 낡아서 누렇게 된 사진에서라도 귀중한 친척과 친구들의 그리운 모습을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 사진작가 안 윅또르의 각별한 재능에 대해 말하면서 또 하나의 명구가 기억에 떠 오른다: <재능은 하나님이 주지만 인간이 그것을 실현한다>. 안 윅또르에게는 이 두 가지가 성립되었기에 우리가 오늘 그의 창작에서 기쁨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1992년에 윅또르 이와노비치와 일주일 동안 까라간다에서 일한적이 있었다. 그는 광부, 야금업자, 인테리 등 주인공을 많이 촬영했다. 어려운 시기였기에 우리가 여관에서 지낸 것이 아니라 저명한 조각가 최 알렉세이 니꼴라예비치 (그는 소련미술가동맹 맹원이였는데 2007년에 알마티 부근에서 참사했다) 의 작업실에서 살았다. 많은 시간을 윅또르와 교제한 후에 여러가지 논쟁, 그의 철학적 숙고가 나의 기억에 남았다. 그는 그 나날에 광부들의 사진묶음외에 알렉세이 니꼴라예바치의 부친 – 최남규의 희귀한 사진을 찍었다. 사진에는 지팡이를 짚은 현명한 동양인 노인이 묘사되었는데 그의 시선은 과거와 영구에로 돌려졌다. 사진작가에게는 이런 사진이 몇십장이 있다. 미국출판사가 그 사진대신 거액을 주겠다고 했으나 윅또르 이와노비치는 그런 거래를 절대 하지 않는다. 

원동으로부터 고려인 강제이주 주년일에 즈음하여 발행된 <카자흐스탄 고려인들의 사진년대기>가 사진작가의 또 하나의 명작으로 되었다. 저명한 역사학자 강 게오르기 박사는 서두에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 평소와는 다른 원칙이 앨범의 기본으로 되었는바 거기에는 구체적 인물이나 주인공의 이름을 짚지 않았다. 얼굴을 걸쳐 묘사된 디아스포라의 전형적인 형상이 있다. 앨범 저자의 생각이 성공적으로 실현되었다! 앨범에 찍힌 많은 인물들을 알아볼 수 있다. 이 훌륭한 분들이 과거의 그 어려운 시기를 직접 겪었으며 그들의 후손들은 오늘 카자흐스탄과 중아시아 공화국들에서 고려인-강제이주민들의 이미지를 당당히 지켜 나가고 있다. <지난 세기의 마돈나>연재사진만 보아도 얼마나 멋진 것인가! 윅또르 이와노비치의 주의깊은 시선이 우리에게 동양여성의 놀랄만한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초상화던 자연경치던 안 윅또르의 사진명작에서는 루블료브 화가의 비극적인 호흡, 레위딴 화가의 슬픈 평온을 느낄 수 있다. 1938년에 남편이 총살당한 고려인 미망인의 형상이 바로 그러하다. <동부카자흐스탄>, <외로운 나무>, <초원>과 같은 경탄을 자아내는 사진들은 자연의 영원한 질서에 대한 생각을 갖게 한다. 안 윅또르 이와노비치는 <디아스포라가 걸어온 길>프로젝트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우스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의 모든 지역 사람들이 그의 창작품들에서 소련 시대에 우리 동포들의 생활을 알아보았다. 그는 거의 온 나라를 걷고 또 걷고 찍고 또 찍었다. 그는 화가의 독특한 시선만이 잡을 수 있는 귀중한 순간들을 포착하였다. 안 윅또르 사진작가가 창작한 명작들은 감사하는 후손들을 항상 감동시킬 것이다.

손 블라지미르
리 블라지미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