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 콘스탄틴:

일생의 직업을 선택하는것은 각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들중 하나이다.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에 낭만적인 기분에 끌려 그 어떤 분야를 택하거나 혹은 여러가지 사정에 따라 첫 직업을 택하게 되지만 타고난 소질이 있다면 결국에는 꼭 그 소질이 전공한 직업과 인연을 맺게된다. 본 기사의 주인공인 유 콘스탄틴도 어문학자의 직업을 전공하기전까지 먼 길을 걸어야 하였다. 그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 오르막고 있었고 내리막도 있었다...
고려인 주인공과 만나 담화하게 되면37년도 비극에 대한 이야기를 피할 수 없으며 다만 몇줄이라도 쓰게 되어 있다.  강제이주를 직접 체험한 증인들은 날이 갈수록 더 적어지고 지금은 그들의 자식들에게서 그 이야기를 듣게 된다.

콘스탄틴의 말에 의하면 할아버지의 고향이 함경북도 명천인데 키기 거의 2미터되는 몸집이 큰 분이였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유명한 씨름꾼이였다. 씨름경쟁에서 이겨 소도 상으로 받은 적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피기 들끓는 새파란 청춘으로 독립운동에 몸담았는데 결과 일제의 탄압을 피해 17세의 나이에 러시아 연해주로 넘어오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포시예트구역 하산부락에 자리를 잡았다. 그래서 콘스탄틴의 아버지가 하산에서 태여났다. 고려인들이 원동에서 강제이주되었던 해에 아버지의 나이가 여섯살이였다. 그러니 그당시에 있던 어떤 일들이 어린아이의 기억에 남은 것은 물론이다.

-아버지의 가족들은 우스베키스탄의 지사크초원에 실려왔답니다 -  콘스탄틴이 아버지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한다 - 사방은 끝없는 초원이고 갈대만이 바람에 설레였다고 합니다. 살아남기 위해 고려인들은 갈대를 베여 임시 거처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물에 잠겨 있는 갈대밭에 들어가기  물고기들이 들끓었습니다. 인적기가 없는 곳이여서 누구도 잡지않으니 물고기들이 계속 번식한 것이지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속담과 같이 갈대와 물고기가 고려인들이 생존하는데 큰 도움으로 되었습니다...

몇년후에 가족들은 타스켄트주 중치르치크구역 <볼세비크>솝호스에 이주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콘스탄틴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만나게 된 사연을 간단히 이야기하련다. 그의 장래 외할아버지는 황해도 출신인데 취주악단에서 음악을 놀았다. 그 역시 러시아원동으로 넘어왔는데 강제이주 시기에 우스베키스탄의 하부치르치크구역 <칼 맑스>명칭 솝호스에서 살게 되었다. <볼세비크>솝호스와 <칼-맑스>솝호스간의 거리가 3키로미터였다. 그러니 두 솝호스의 고려인들이 서로 교제한 것은 물론이다. 콘스탄틴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미 학창시절때부터 서로 알고 지냈다. 그들의 우정은 7년이란 긴 세월의 시련을 이겨냈다... 

남편보다 먼저 대학 (타스켄트국립대 물리-수학과)을 필한 콘스탄틴의 어머니 조 리지야 알렉산드로브나는 남편이 고등지식을 소유하도록 설득시키고 가능한대로 뒤받침하여 주었다. 그리하여 아버지는 타스켄트국립대 역사-지리학과를 졸업하고 <칼-맑스>솝호스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체육교사의 직책도 겸했다. 그의 아버지 유 알렉세이는 여러가지 종목의 스포츠에서 우수한 성과를 땄다. 콘스틴틴은 이 솝호스 학교에서 4년동안 공부하였다. 교사로 근무한 아버지와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코스쨔는6세에 일학년에 입학했다. 

1974년에 콘스탄틴의 가족들은 투르크메니스탄으로 이주하게되었다. 그의 아버지가 타샤우스에 있는 <소련공산당 제 20차대회>명칭 솝호스에 있는 낙후한 학교로 파견되었기 때문이다. 교육분야에서 경험이 많고 조직적 수완이 뛰여 난 유 알렉세이는 6년후에 이 학교를 구역에서 가장 선진적인 학교로 만들었다. 

중학을 필한 콘스탄틴은 1980년에 고리끼명칭 아스하바드 국립대 외국어과 (독일어, 영어)에 입학하여 1985년에 필했다. 그가 올림피아드에서 훌륭한 실적을 보였기에 대학지도부는 그에게 강좌에 남아서 일할 것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콘스탄틴은 부모들이 그당시 거주하던 우스베키스탄의 타스켄트시로  파견장을 받아 그 곳 제 2호 학교에서 영어교사로 근무했다. 
콘스탄틴은 대학생 시절 때부터 카자흐스탄의 수도 알마아타에서 살기를 희망했다. 그래서 결국 알마아타로부터 그리 멀지않은 크라스노예 뽈레 부락에 정착하기로 했다.

-그런데 주택문제는 어떻게 해결했나요? 

-우리 가정이 뚜르크메니야에서 살 때 부업을 할  땅을 받았습니다. 땅의 면적이 컸기에 거기에서 농사도 짓고 가축도 키울 수 있었습니다. 우리 집에는 돼지들도 있었고 닭도 키웠습니다. 적지 않은 수입이 들어왔지요, 대신 쉴새없이 일을 했어요. 그 당시에는 부자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게 일한 대가로 번 돈으로 크라스노예 뽈레에 독집을 샀지요 - 콘스탄틴이 이야기 하였다. 

알마아타에 와서 콘스탄틴은 로베르트 형의 협력하에 알마아타 건축건설대학 스포츠 지도원으로 취직했다. 독자 여러분은 왜 갑자기 콘스탄틴에게 대한 이야기가 스포츠와 연관되는가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축구에 재능이 있는 콘스탄틴은 직업적 축구선수로 될 수도 있었다. 벌써 14세때에 모스크바 교외에 있는 제르진스크시 올림픽 축구예비선수단 학교에 입학하려고 한달동안 부모를 졸라댔다. 이 스포츠 학교에 입학하려면 콩쿨을 경과해야 하였다. 
-나는 소련의 전역에서 온 350명의 스포츠맨들 중에서 유일한 고려인이였습니다-콘스탄틴이 이야기한다 -  나이에 비하면 비교적 키기 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나날이 즉 1979년 8월에 비행기사고로 타스켄트 <빠흐따꼬르>축구선수단 전원이 사망했습니다. 그중에는 온 나라에 널리 알려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선수 안 윅또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8번호가 찍힌 윅또르의 축구유니폼을  상징적으로 저에게 주었습니다. 아마 그날 내가 괜찮게 축구를 놀았던 모양입니다: ...경기에서 골을 넣고 빨리 뛰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영향을 주었던지 나를 상기 스포츠학교에 받아들였습니다.

콘스탄틴은 처음에 축구를 계속하려는 생각이 있었지만 낯선 도시에서 생활을 하게 된 그는 그 생각을 바꾸어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다른 종목 즉 권투섹치야에 등록하여 열심히 권투를 배웠다. 그렇다고 해서 축구를 영 버린 것은 아니였다. 그는 대학축구팀에 참가하여 4년동안 대학을 대표하여 놀면서 네번 있은  공화국축구선수권 대회에서 4중 은메달 수상자로 되었다. 
언어에 대한 애착심을 콘스탄틴이 어머니에게서 물려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물리-수학 교사인 그의 어머니는 러시아어와 조선어외에 우스베크어와 타지크어로도 훌륭히 대화를 하였다. 하긴 콘스탄틴 자신도 다민족 환경에서 살았기 때문에 스스로 타민족들의 언어를 배우게 되었다. 이미 소년시절에 그는 조선어, 러시아어, 우스베크어, 터키어 지어는 둔간어로 말할수 있었다. 그 후에 투르크메니아어와 카자흐어도 소유했다.

유 콘스탄틴은 언어학자로서 성공의 길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과 접촉하였다. 그중에 다수가 그의 성장에 긍정적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탐욕적 목적으로 그에게 접근한 불성실한 사람들도 만났다. 콘스탄틴은 그런 사람들에게 대한 불쾌한 이야기는 접어두기로 한다. 특히 그가 비즈니스를 하게 되었던 90년대에  그런 사실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 콘스탄틴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회상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그는 알마아타건축건설대학 강좌장 아르놀드 라비노비치, 외국어대학 교수 아브라암 까를린쓰끼,, 언어학 박사, 교수 모이세이 꼬쁼렌꼬, 헬싱키 종합대학 고송무교수가 그의 성장의 길에서  큰 역할을 놀았다고 간주한다. 그 외에도 그는 알마아타 한국교육원 초대 원장 신계철, 스포츠분야에서는 한때 유명한 권투선수였으며 1950년도 소련쳄피온이였던 중국인 트레이너 블라지미르 야꼬블레브 (그는 러시아 성명을 가졌다)를 항상 기억에 두고 있다. 그가 시, 공화국 축구선수권 대회에서 여러번 시상대에 오른데에는 야꼬블레브 트레이너의 공로가 크다.  유 콘스탄틴이 언어학을 완성함에서 한국국립국어원 서정목 원장의 협력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 그가 한국에서 거주하면서 2년동안 석사과정을 통과한 것은 서원장님의  뒤받침이였다고 말할수 있다.

창작계가 잘 알고 있는 시인, 작가, 기자 김병학 선생님과의 만남은 콘스탄인의 번역가의 실력을 들어냈다. 우리는 현재 한국 광주시에서 거주하는김병학선생과 통화하여 유 콘스탄틴과의 창작사업에 대해 알아보았다:

-우리는 유 콘스탄틴과 여러가지 일을 함께 했습니다. 2019년에 <김경찬 장군의 전설적 민족해방 투쟁록 경천아일록 읽기>책을 펴냈는데 이 책은 김경천 장군이 연해주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면서 1919-1925년에 쓴 <경천아일록>이라는 일기로서 제가 이것을 탈초하고 현대 한국어로 번역하였고 유 콘스탄틴이 이것을 다시 러시아어로 번역해서 한국어-러시아어 합본으로 펴낸 것입니다.  2020년에 제가 아바이 시인의 시 106편과 서사시 2편을 번역하여 <황금천막에서 부르는 노래>라는 번역시집을 냈는데 이 중 6편의 시와 2편의 서사시를 유 콘스탄틴의 도움으로 번역했습니다 - 김병학 작가가 이야기 하였다.
이 외에도 콘스탄틴은 지난해에 화가 문 윅또르와 함께 한국동화집 <신비로운 샘>을 창작해 냈는데 그가 동화를 러시아어로 번역했다. 동화집은 러시아어로 구사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선물로 되었다. 

유 콘스탄틴은 안해 인나와 딸애 둘을 낳아 대학을 졸업하도록 뒤받침하여 주었다. 맏딸은 외국어대학을필했고 둘째 딸은 키멥을 졸업했다. 

-콘스탄틴 알렉세예비치, 현재 어떤 창작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까?

-언어연구와 연관된 사업인데요 당분간 그것을 비밀로 덮어두기로 합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될 것입니다.

-성공을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남경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