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자랑

꾸르만가싀 거리에 놓인 이 집을 나는 수년째 알고 있다.  이 집에서 우리가 존경하는 한 구리 보리소비치가 거주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한해서는 그 분이지식의 보물고이다. 구리 보리소비치는 자기의 운명으로 사람이 선의와 공정성의 생동한이상으로 무장되였다면 그런 사람의 의지를 그 무엇으로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확증하였다. 일생을 두고 적극적이고 활기찬 생활을 살아오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 어떤 장애물도 두렵지 않다. 우리의 동시대인들과 구리 소비치보다 이상이 되는 사람들에게 한해서는 구리 보리소비치가 대자로 쓸수 있는 선생으로 되여 있다. 젊은 학자들에게 한해서는 구리보리소비치가 모범으로 되여 있고 많은 고려인들에게 한해서는 성실성, 현명성, 인간성의 위신으로 되여 되여있다. 한 구리 보리소비치에게는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이 있고 그 분 자신의 의견이 있으며 우리가 그것을 완전히 믿을 수 있다. 이미 수년째 시력이 약하고 최근에는 청각도 약하졌지만 그는 시대에 발맞추어 나가는 현대인으로 남아있다. <저는 현재 자식들에게 완전히 달린사람으로 되었습니다. 그 애들이 내가 식사할 때 도와주고 산보도 합니다. 그런데 나는 정보를 모르고는살 수 없습니다. 그러니 자식들이신문을 읽으면서 나라에서,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알려줍니다> - 구리 보리소비치가 이야기 한다. 우리 신문을 읽으시는가하는 나의 질문에 구리 보리소비치가 대답하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알아봅니다! 그런데 최근에 신문이 재미있다고 협회에  전해주십시오...

한 구리 보리소비치에게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소설을 쓰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 소설은 자신과 시대에 대한 것으로 될것이다. 기사에 <개성>이란 표제를 달면 맞기는하지만 불충분하다. 다른 표제 <의지가 강한사람>이 떠 오르는데 이것도 불충분하다. 왜냐 하면 그는 공동의 위업에 기여를 하기 위해 여전히 지식을 얻고 육체적 자원을 탐구하면서 좀 이상하게 들리는것 같지만   고려인 사회운동, 나라와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태에 계속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구리 보리소비치 자신이 본 기사를 두 부분으로 나눌 것을 제의했다. 첫 부분은 개성으로서 그의성장의 기본 단계에 대한 것이다. 그 자신이 이 단계를 사건이 풍부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의 생활의 길은 탄탄하지가 않았다. 또한 그는 출세를 위해 양심을 파는사람이 아니였다. 왜냐 하면 그에게 있어서는 가정과 딸 넷이 첫 자리에 있었다. 그는 딸들을 조국 - 카자흐스탄 그리고 자기 뿌리에 대한 사랑의 정신으로 교양했다.

강의로 사람들을고무시키는 직업이 있다

사상가, 계몽자, 정치학자, 철학가 - 이 모든 명명은 구리 보리소비치의 하나의 활동을 확정하였는바 그는 직업적 강사이다. 그의 노동이력서를 보고 그의 불변성, 자기직업에 대한 충실성을 지적할 수 있다 - 그는 65년동안 당기구에서 근무했고 25년은 고급 당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는 언젠가 그를 고무시켰던 하나의 당, 그가 믿었던 이상에 1954년부터 충직하였다.  
구리 보리소비치는 대학 3학년 때부터 공청동맹의 위임을 받아 각종 행사에서 강의를 ㅡ하였다. 그의 설득력 있는 말은 사람들의 심장속에서 반응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이것이 직업을 선택할 때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방금 대학을 필한 풋내기가 딸듸꾸르간주당위원회 강사그루빠 지도자...이 사업체계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일자리 자체가 큰 장래를 약속한다는것을 이해할것이다. 구리 보리소비치가 젊었었지만 즉시 후보 당원이 되었다.  젊은 강사는 청중을 끌어당기는 경험을 기타 강사들과 남김없이 나누었다. 그런데 이런 소질은 타고 나는 법이다. 여러 강당에서  강의를 청중이 쉽게 이해하고 주의깊게 듣도록 누구나 다 할 수 있는것이 아니다. 강의가 재미없으면 강당을 떠나거나 조우는 페단이 있다. 한 구리 보리소비치의 실력은 즉시 눈에 띠웠다. 물론 그는 사회에서 특혜 혹은 기타 물질적 부를 받을 수 있는  지도원 혹은 기타 행정직책을 차지할 수 있었다. 구리 보리소비치네 가족들이 많았지만 다년간 작은 집에서 거주하게 되었다. 젊은 부부외에 그의 부모, 누이 두 명 그리고 딸애 넷이 한 집에서 살았다. 그러나 가정생활에 있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지식을 주며 그들에게 나라의 사회생활의 상황을 알리려는 구리 보리소비치의 소원을 버리게 할 수 없었다. 때문에 그는 당위원회가 그에게 제의하는 새로운 출세를 또 거절하였다:
-저는 강사입니다  -  라고 말하면서 거절했다.
그 당시에 철의 장막으로 인해 외국으로 떠나는 것이 아주 어려웠다. 그런데 구리 보리소비치에게는 허가되었다. 그가 북조선, 아프리카, 애급, 독일민주주의공화국, 독일연방공화국, 미국, 일본에서 카자흐스탄을 대표하던 시기가 있었다. 한국에만 해도 열번 이상 다녀왔다. 어디를 가나 반응이 좋았다.

애국주의와 건전한 사상이 이미 민족주의가 아닌 시대

-구리 보리소비치, 박사님은 순전한 고려인이시지요? 이에 대해 상기시킨적이 있습니까? 민족주의자들이 어디에나 있거던요. 더군다나 직책도 보통이 아닌데요 - 직업적 사상가에게 질문을 해 본다.
-나는 자신을 항상 국제주의자로 간주했습니다 - 구리 보리소비치가 대답한다 - 아마 그러기 때문에 그런 기소에 대해 생각조차 하지도 않았
던 모양입니다. 그저 일하면서 여러가지 문제를 연구했지요. 한번은 다른 직
장에 전임하려고 하는데 저의 지도자가 말하는 것이지요:< 자네는 고려인인데 다른 일에 대한 생각은 버리고 가만히 앉아 있어라구, 운이 좋아 좋은 일을 하고 있는데...>. 나는 어쨌든 결국 직장을 바꾸었습니다.
그 사람은 후에 만나 사과하더라구요 - <내가 그 때 한 말을 잊으라고, 자네가 당 기관에 계속 남아서 일하도록 그 말을 한거야...
60년대에 올자스 술레이메노브의책 <아스 이 야>에 대한 비방이  시작되었을 때 심중한 일이 있었다. 카자흐스탄 시인을 민족주의자로  기소하는 여러가지 발표문이 실렸다.  구리 보리소비치더러 이 책에 대한 평론
을 써 달라고 부탁했다. 이것이 비공개적인 평론이 되어야 하였다.
-나는 올자스 술레이메노브의 이 책을 두번이나 읽어보았고 그의 다른
작품도 읽었지만 민족주의와는 인연이 없었습니다 - 구리 보리소비치가 회상한다 - 그 누구에게는 민족주의로 보이는 것이 실지에 있어서는  민족들의호상풍부화의사상이라고 솔직하게 썼습니다. 다행하게도 모든 것이 무
사히 끝났습니다 - 비난의 파도가 잠잠해 졌습니다.
-박사님도 <내가 도대체 누구인가?>라고 자문한적이 있습니까?
- 물론이지요. 이와 관련하여 1990년 3월 17일에 진행된  카자흐스탄고려인 제 1차 대회가 기억이 납니다.  10-15년전에 이런 포럼이 불가능했습니다. 나에게 민족주의자라는 기소를 들씌웠을 것입니다! 같은
민족들끼리 모여서 이런 대회를 한적이 없었거던요...우리의 대회가 있은  후에 거의 모든 민족중앙이 이런 대회를 소집했습니다. 이것은 오늘 각자가 자신을 개별적 인종의 대표로 자체동일시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우리 다민족 나라에 한해서는 이것이 나라의 융성발전에 협조할 뿐입니다.

행복한 계속

소련시대에 한 구리 보리소비치를 카자흐스탄의 소린이라고 불렀다 ( 왈렌찐 소린 - 유명한 정치학자, 정치 평론가). 구리 보리소비치가 이 명칭에 딱 맞았다. 당학교에서 근무할 때부터 이 명칭이 그에게 붙었다.상급반 학생들은 그의 강의에 대해 < 우리 지방의 소린의 강의를 빼 놓지말아야지...>라고 말했다. 그러면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학생이
-왠 소린이야? 강사의 성이 한씨지 않아 -라고 하였다.
-강연을 들어 봐, 그러면 알꺼야...현재 구리 보리소비치의 두 딸 - 이리나 구리예브나와 스웨틀라나 구리예브나가 교사로 근무하고 있다. 동력대학에서 일하는 스웨틀라나 구리예브나는 심켄트에서 우란광 채굴에 관한 프로젝트를 성과
적으로 실천하고 있으며 이리나 구리예브나는 알마티 메녜즈멘트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 자신과 주위 사람들에게 대한 원칙성이 강한그들은 자기의 뿌리인 아버지 구리보리소비츠와 이미 세상을 떠난 어머니 시나이다 블라지미로브나에 대한 긍지감을느끼고 있다. 시나이다 블라지미로브나는 남편과 고락을 나누었다. 딸 나딸리야는 우크라이나에서 가족과 함께 살고 있으며 딸 옐레나는 애석하게도 40세에 이 세상을등졌다. 구리 보리소비치에게는 손군이 일곱이고 증손이 열세명이다.
-우리 가정을 국제주의가정이라고말할 수 있습니다, 80%가 카자흐인입니다- 구리 보리소비치가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 한다 
- 사위 하나는고려인이고 하나는 우크라이나인인데 카자흐인과  러시아인 사위도 있습니다. 현재 손녀 율렌까의 가족들이 나와 함께 지냅니다. 
증손녀들인 아일린과 아말리는 저의 기쁨입니다! 맏손녀 일린은  재간둥입니다 - 춤도 잘 추고 노래도 부르고 대화도 잘 하니까요. 유치원에서 그 애를  상급그루빠로 옮겼습니다. 저를 구리할아버지라고 부르고요 사돈은 아따스까라고 부릅니다. 어떤경사에 갔다올때에는 꼭 사탕이나 과자를 가져와서 저에게 줍니다. 
우리가 90세의 구리 보리소비치와 담화를 하고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 그 분은 10년, 20년, 5년전과 마찬가지로 사건이 있었던 날자를 다 기억하고 있다.
-이야기가 길어져서 피곤하시지요?- 내가 묻는 말에 구리 보
리소비치는 아래와 같이 말한다:
-전혀 그렇지가 않아요, 최근에 저에게는 교제가 부족하거던요. 만일 신문이 저의 이야기에 괸심이 있다면 얼마든지 이야기힐 수 있습니다  

- 저에게는시간이 많으니까요...
우리는 한 구리 보리소비치 원로께 건강하시고 그의 열의가 식지 않을 것을 기원하며 한씨 가문의 후손들이 새로운 업적으로 할아버지에게 기쁨과 긍지감을 안겨 줄 것을 바라는 바이다!  

진 따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