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카자흐스탄 동포3세이다

나는 카자흐스탄 동포3세이다. 우리 할아버지 고향이 어디신지 잘 모른다. 외할아버지의 고향은 강원도 양양이다. 1920년생이신 우리 큰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고향에 대한 많은 것을 아셨을 것이다. 그러나 1937년의 스탈린의 강제이주 공포와 관한 기억이 생생했기 때문에 조국과, 할아버지의 고향에 대한 질문들을 무시하시거나 “더 이상 묻지 마라!”라고 하셨다. 

둘째 큰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한글로 작성하신 가족에 대한 기록들을 보유하고 계셨는데 40년전에 집에 화재가 나서 고향과 관련 귀중한 모든 기록들이 불타 버렸고, 화재 이후로 둘째 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우리 할머니도 한반도에서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하기 전 고향을 기억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강제이주를 당하신 분들에게 눈 앞에는 그 당시 무서운 장면들이 살아 있어서 조국에 대한 이야기는 금기였다. 

셋째 큰 아버지는 “연해주에서 우리 아버지는 조그만한 식료품 가게를 운영하고 계셨다. 부자도 아니었는데 러시아 연해주에서 카자흐스탄으로 도착하자 아버지가 고발없이 체포되었다. 그 후 네 할아버지에 대한 소식이 끊겼다”라고 말하셨다.
거의 모든 고려인들은 1937년 강제이주에 관련 비슷한 비극적인 가족 스토리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원주민인 카자흐 민족으로부터 도움을 받지 않았으면 낯선 땅에서 생존하기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1930년대 중반에 유목 생활을 하는 카자흐사람들은 몇년 계속 가뭄을 당해 매우 어렵게 생활하고 있었다. 먹이가 많이 부족해서 소, 양, 말들이 많이 죽었고, 가축들을 키우며, 고기를 주식으로 먹는 유목민들도 식량이 떨어져 많이 사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자흐사람들은 머나먼 극동에서 카자흐스탄까지 강제이주를 당하고, 카자흐언어도 러시아어도 모르는체 낯선 고려인들에게 먹을 것과 집을 나누어 주고, 적응할 수 있도록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당시 우리 부모님은 어린 나이였다. 매우 가난한 어린 시절에다가 몇년 후 2차 대전이 일어났다. 그 때 제대로 먹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농업 집단들이 독일군과 싸우는 소련군의 전쟁으로 군량미를 확보해야 하기 때문에 아이들까지 수확을 도와야 했다. 부모님의 이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이러한 어려운 생활을 하신 우리 부모님은 최선을 다해서 대학에 입학하셨다. 어머니는 러시아에서 공업대를 나오셨고, 아버지는 알마티 국립 사범대학을 졸업하셨다. 대학을 마치고, 알마티로 오셔서 어머님이 몇 십년 동안 기계/장비 제작 연구소에서 엔지니어로 근무하셨고, 아버지는 오랫동안 전문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치셨다. 우리 부모님은 형과 나에게 “너희들은 우리 보다 행복하게 잘 살아야 한다. 우리가 물론 너희들이 잘 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지만, 너희들도 나름대로 노력해서 열심히 살아야 한다”라고 늘 하신 말씀이었다. 

대부분의 다른 동포들과 같이 나와 형은 학교, 대학에서 공부를 열심히 잘 했다. 이로 인해 고려인들은 카자흐스탄 소수민족 가운데 이미 교육 수준이 높은 민족으로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동시에 자기 민족 언어를 빨리 잃어버린 민족이 되버렸다. 
현재 3~4세 동포는 모국어를 못할 뿐만 아니라 자기 성씨를 정확히 모르고 있다. 유이는 고려인들은 한반도에서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한 다음으로 러시아 정부가 정착한 고려인들을 조사할 때 러시아식으로 많은 성씨를 기록한 것이다. 김씨, 박씨, 이씨는 문제가 없었는데 정씨, 전씨와 천씨를 ‘텐’씨로 기록했고, 차씨와 채씨를 ‘짜이’ 또는 ‘쯔하이’로 기록했다. 
내 성은 러시아식으로 ‘짜이(Tsay)’라고 한다. 성씨를 정확히 알기 위해 내가 알마티에 계신 박일(1911~2001) 유명 철학 및 한국학 박사님에게 내 성씨를 정해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직접 만나지 못하신 박일 박사님은 전화로 약 1시간 동안 이것저것 물어보면서 “자네 성은 차씨고, 본은 연안이다”라고 결정을 내리셨다. 이렇게 내가 가장 중요한 것인 성씨를 알아냈다. “이제 모국어를 열심히 배워야겠다” 굳게 마음을 먹었다…  

알마티 국립 대학교에 입학하여 한국어를 열심히 배우면서 알마티 한국교육원에도 빠짐없이 다녔다.  대학교를 졸업 1년 후1997년도에 재외동포재단이 실시 시작한 초청장학생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나는 필기 시험과 인터뷰에 합격하여 선발되었다. 이렇게 한국에서 유학하고 싶은 내 꿈이 이루어졌다.

서울대학교의 우리 지도 교수님은 구소련 동포들의 역사를 조금 알고 계셨다. 자기 뿌리를 잃어버려 족보를 보유하지 않은 것도 아시고, 나를 도우려고 하셨다. 서울에 있는 ‘연안 차씨’의 사무실 겸 자료와 기록의 보관소의 주소를 찾아내고 알려주셨다. 내가 그 사무실을 어렵게 찾았다. 사무실에 계시는 어르신 두분이 나를 물으셨다. “자네 할아버지의 한국 성함이 뭐예요?”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대답했다. 그 분들은 “할아버지의 고향이 어디였는지 알아요?” 나는 똑 같이 “잘 모르겠습니다” 대답했다. 어르신 분들은 “그럼 못 도와주겠소. 둘 중에 하나라도 알면 찾아볼 수 있겠지만  할아버지의 성함과 고향을 모르면 자네 뿌리를 찾기가 불가능하다”라고 하셨다… 

매우 안타깝게도 유학 시절 때는 한국에서 뿌리를 찾지 못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내 아들들, 손자들을 위해 꼭 찾아야 한다는 소원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