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여러분이 알다싶이 본사는 드문 이름을 가진 고려인을 찾아 부모들이 왜 그런 이름을 주었는가 이야기 한다. 왜냐 하면 거기에는 항상 그 어떤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대상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이번에는 우연히 그런 주인공을 만나게 되었다.  차가이 (차) 일라리야 아나똘리예브나가 오빠가 쓴 시를 가지고 신문사를 찾아왔다. 그녀의 오빠 김 블라지미르 아나똘리예비치는 아주 유식한 분이였다. 일라리야 아나똘리예브나는 오빠가 노년에 건강이 좋지 못한데도 창작사업을 계속하면서 쓴 작품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블라지미르 아나똘리예비치는 선조들에 대해, 간난신고를 맛본 모국 (그의 고향은 북조선이다)에 대해, 한민족의 영광스러운 업적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의 첫 시가 얼마전에 본지에 게재되었다. 시와 함께 일라리야 아나똘리예브나의 오빠 다섯명의 사진들도 신문에 실었다. 그중 하나인 블라지미르 아나똘리예비치가 알라리야의 아버지인데 그는 다섯가지 언어를 소유했으며 한 때 <새 조선>잡지사에서도 근무했다. 형제들은 다 사회에 필요한 직업을 전공하였으며 훌륭한 가정을 이루고 실력이 있는 자녀들을 자래웠다. 저의 관심을 이끈 것은 일라리야라는 드문 이름이였다. 그렇게 드물고 아름다운 이름에는 꼭 그 어떤 사연이 숨어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저의 이름에는 특별한 것이 별로 없습니다 – 일라리야 아나똘리예브나가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오직 저와 같은 이름을 가진 여성을 한 명도 만나지 못한 것 따름입니다…그래서 내가 젊었을 때 주위 사람들이 이름을 기억하기 어려워 하면 그저 라라 또는 라리사라고 불러라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나를 라로츠까라고 애칭하여 부르기를 좋아했거던요…그런데 내가 성인이 되어 한 기관의 지도자가 되자 저를 부칭까지 붙여서 불렀습니다. 결국 라라나 라리사 아나똘리예브나가  싫어졌습니다. 내가 일라리야기 때문에…내게 이 이름이 소중한 것은 할아버지 (김광호 – 블라지미르 페도또비치)의 간청에 따라 아버지가 주었기 때문입니다. 
알고본즉 이 이름은 먼 과거에 뿌리를 두고있다. 우리는 일라리야 아나똘리예브나의 이야기를 계속 들어본다.

-저의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는 자식이 여덟명이였습니다 – 아들이 다섯이고 딸이 셋이였습니다. 한 때 신학교를 졸업한 우리 할아버지는 나의 고모에게 일라리야라는 이름을 주고 내가 태여나자 부모들이 나에게도 일라리야라는 이름을 줄 것을 주장했습니다. 때문에 아마 나의 이름은 교회에서 나온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나를 몹시 귀여워했고 나역시 할아버지를 극진히 사랑했습니다.

그러면 일라리야라는 희귀한 이름의 진상을 좀 알려주려고 한다. 이 이름은 라틴어 Hilarius에서 생긴 것이다. 그런데 Hilarius는 옛희랍어 <힐라로스>에서 생겼는데 이는 <쾌활하다>, <기쁘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보건대 아무런 특별한 것이 없는것 같다. 그저 우리의 사고방식에  그것이  익숙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면 실지에 있어 그 어느 한 나라에서도 적응되지 못한 일라리야라는 이름이 사라졌다는 말인가?

보다 싶이 영 사라진 것이 아니다. 이 이름이 어울리며 이런 이름을 가진 개성에게 그의 의미를 주장해주는 행복한 여성들이 있다. 

-우리 동시대인들이 얼마나 많은 시련을 겪었는지 아십니까 – 일라리야 아나똘리예브나가 회상한다 – 때로는 즐거워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우리 가정은 수년을 북조선에서 살았습니다. 저 역시 북조선 태생입니다. 세계를 거의 절반을 돌다싶이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목숨을 걸었을 때도 있었지요…우리 가정은 중국, 북조선에 갔다가는 다시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우리 큰 가정은 다 무사히 살아남았습니다. 우리의 가족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한해서는 비극으로 된 사변도 겪었습니다. 우리가 타고 가던 객차가 화물차와 부닥쳤습니다. 이 열차전복 과정에 죽은 사람들도 있었고 부상자들도 많았습니다. 우리는 대행히도 크게 놀랐을 따름입니다. 오빠가 웨드로에 넘어져 눈섭을 다쳤을 뿐입니다. 오늘 이 지난일을 회상하면서 아래와 같은 생각이 듭니다: < 혹시 이것이 하나님의 예지가 아닌지? 깊은 신자이고 신학을 전공한 할아버지가 저에게 이런 이름을 줌으로서 하나님의 <보수>를 받은것이 아닌가고 말입니다. 그래서 생활의 모든 난관을 겪으면서 동년배들과 달리  어려운 아동시절이 무엇인가를 알았기에 나는 쾌활하고 때로는 웃기를 좋아할 권리가 있단 말인가…나를 쉽게 쾌활하게 하고 웃길 수 있었습니다. 내가 근무했던 집단에서도 나의 쾌활한 기분이 모두의 마음에 들었습니다. 리더의 품성이 일라리야란 이름을 가진 자들의 또 하나의 장점입니다. 나는 카자흐건재계산중앙에서 오래동안 부장으로 근무했는데 우리 집단이 아주 화목했습니다.

일라리야 아나똘리예브나는 엄혹한 북방 도시 마가단에서 로동의 길을 밟기 시작했다. 그는 이 도시에서20여년을 살았다. 그러나 일라리야는 따듯한 고장이라고 할 수 없는 이 혹독한 지방에서 지낸 년간을 그의 생활에서 가장 좋았던 시기로 간주하고 있다.

-북방이 사람들을 끌어당긴다고 합니다 – 일라리야 아나똘리예브나가 한숨을 쉬면서 말한다 – 이것이 모든것을 말해줍니다. 그 지방의 깨끗한 흰 눈이 지금도 꿈에 보이는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저의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보통 사람들이 아니라서 그럴까요… 

일라리야 아나똘리예브나는 이야기를 계속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친척들도 동료들도 다 재능이 있고 마음이 착한  훌륭한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을 주위에 두고 있는 대화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자신이 아주 친절하고 모두를 도와주려고 한다고 판단할 수 있다.  

우리 주인공의 생활에서 있은 또 한가지 사연을 이야기하고 싶다. 

늦게 출가한 일라리야는 후에 남편과 헤여진후 딸애를 자래우기 전에는 절대 재가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새 남편이 레노츠까를 엄마처럼 사랑하겠는가 누가 알겠는가…그런데 역시 홀아비로서 아들 둘을 키우던 장래 남편 (고 게롤드 알렉산드로비치)과 면목을 익혔을 때 그 역시 재혼하지 않기로 결심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게롤드와 가깝게 알게 된 일라리야는 결국 결심을 바꾸었다. 물론 여기에는 게롤드 알렉산드로비치가 땔애의 마음에 들었고 또 아들들이 일라리야 아나똘리예브나를 좋아한데도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정이 합치도록 친구들도 협력하였다.

-결과 우리는 35년을 화목하게 살아왔습니다 –일라리야 아나똘리예브나가 회상한다- 후에 별점을 보았는데 알고 본즉 저와 남편의 이름이 구합에 맞습니다.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요!

-보건대 두 가정도 결합되는것같은데요!

-우리 아이들처럼 자기 부모들에게 대하는 친아들도 드물 것입니다 – 일라리야는 긍지감을 품고 말한다- 우리는 튼튼한 한 가정이 되었습니다.저의 남편 게롤드는 유능한 항공기 정비원이였습니다. 그에게 있어서는 생의 마지막 날까지 가정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었습니다. 일생을 두고 사랑하는 남편을 찾은 그의 어머니의 사연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937년에 바로 결혼식에서 게롤드의 아버지를 체포해 갔습니다. 안해는 남편을 따라 나섰습니다. 맏아들을 낳은 후에 남편을 석방시켰습니다. 그런데 첫 아들이 죽었단 말입니다. 자식을 낳고 새 생활을 시작하려고 했는데 몇개월 후에 게롤드의 아버지를 또 체포했습니다. 그후 그를 누구도 보지 못했답니다. 게롤드는 아바지가 없이 태여나 자랐습니다. 엄마가 재가한 후에도 계속 아버지를 찾았지만 결국 찾지 못했습니다. 오직 수십년이 지나서야 아버지가 1938년에 총살당했다는 서류를 찾아냈습니다. 그러나 무덤은 찾지 못했어요. 남편이 살아있었을 동안에 계속 수소문을 했지만… 

일라리야 아나똘리예브나는 남편에게만 충실했던 것이 아니다. 그 녀는  ( 이것도 역시 그의 이름의 의미에 담겨있다) 남편의 사상, 자식교양에 대한 그의 규칙에도 충실했다. 일라리야는 남편에 대한 느낌의 파도속에서 살았던것 같다.

<…만일 일라리야에게 기쁜 일이 생기면 그에 대해 모두가 알게 된다. 자기의 성공을 항상 주위 사람들과 나누었다…그런데 혹시 기분 나쁜 일이 있으면 자기의 근심에 대해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고 혼자서 속을 태웠다. 일라리야는 아주 자립적인 인물이다. 때문에 그는 누구에게도 부담을 주지 않고 자기의 문젯거리를 혼자서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아무리 복잡한 상황에서도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신의 행동을 항상 단속한다>.

-일라리야 아나똘리예브나, 이것이 당신의 성격을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요?

-다는 아니지만 기본적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흥미있는 것은 저의 이름을 본다면 인자함이 넘치는 사람이 아니거던요. 그래서 기회가 나타나면 <운명>이 나의 과오를 바로잡아 준 것이지요. 나는 처음에 사범대학 역사학부를 택했습니다. 때문에 나의 생활은 오직 정밀과학과만 부단히 연관되었었습니다. 내가 계산센터에서 다시 전공한 직업이 처음에 전공한 직업과 정반대입니다.

-담화를 거의 끝냈는데 무엇에 대해 아직 말하지 않았지요? 이름과 연관된 이야기 말입니다…

-나에게는 출생증명서가 없었으며 또 없다는것을 자인하는바입니다. 그래서 생일을 두번 맞이합니다…

-일라리야 아나똘리예브나, 당신은 이름때문에 완전한 <수수께기>로군요… 

-그러면 당신의 생활에서 어떤 것이 첫 서류였나요?

-하르빈 감독관구 (정교) 스왜또워스크레센스까야교회의 호적에 저의 출생이 등록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저의 부모들과 교부모 그리고 세례를 한 주교에 대한 자료가 있습니다. 생일에 대해 말한다면 생일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통 맞이하는 12월에 쇠고요 또 대순교녀 일라리야의 생일인 4월 1일에 맞이합니다.

이름과 그 이름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 대한 이 기이한 이야기를 들은 후에 <네 이름에 어떤 의미가 담겨있는가>란 질문에 주는 답이 때로는 완전치는 않지만 그것을 충분히 믿을만하다는 것을 또 다시 확신하게 된다.   

진 따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