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한극 – 조선인민군 항공사단 부사령관

역사가 보여준바에 의하면 현대 전쟁에서 전투항공대가 전쟁의 결말에 많은 영향을 준다. 조선전쟁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조선전쟁에는 한가지 특징이 있었다. 조선의 전투기와 폭격기가 조선의 하늘위에 날지 않았고 북조선 비행사나 남조선 비행사들이 조종한 것이 아니라 두 강국 즉 소련과 미국의 공군 비행사들이 조종했다. 조선의 하늘에서 벌어졌던 공중전의 급변이 이제는 비밀이 아니다. 소련과 미국 공군 비행사들의 많은 과학서적들, 논문, 회상기들이 발표되었다. 필자는 조선 하늘에서의 공중전, 기록영화들,  항공기술의 경쟁, 조종기술, 비행사들의 용감성에 대한 러시아제와 미국제 기록영화들을 구경했다. 소련고려인들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설에 참가했다는 테마가 어렴풋이 윤곽을 들어내기 시작했던 25여년전에 나는 제 913호 전투기연대 중위, 전 상급 기술공 빠웰 바뜨루크와  담화한적이 있었다. 그는 소련공군사단에 대해 상세하게 이야기 했는바 그의 항공연대외에 224호, 535호 연대들도 상기 공군사단에 속했다. 그들은 조선의 공중전에 참가하였다. 그런데 그 시기에는 기사의 주인공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었지만 이제는 그에 대해 이야기할 때가 왔다.

최한극은1915년 3월 18일에 따우데미촌의 빈농의 가정에서 태여났다. 이 농촌을 러시아 연해주에 일찍 이주한 한인들이 세웠다. 역사적 문건에는 따우데미촌 형성의 해가 여러가지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우수리스크변강에의 이주 지도에 대한 통보> (1905년)에 지적된가장 이른해 즉 1883년을 옳은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최한극의 탄생년도가1915년이 아니라 1916년이라는 정보도 있는데 1955년12월 7일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상주하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재 소련대사관 영사처에 등록된 소련고려인들의 명단에 이렇게 지적되었다 (로련 대외정치 고문서, 폰드 0102, 목록 11, 공문서 42, 문서철 64, 52페이지).

따우데미에 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최한극이 1923년에 소학반에서 공부하기 시작하여 다음 한인 향촌의 불완전 중학교에서 공부를 계속했다. 그의 가정도 많은 한인 이주민들과 마찬가지로 겨우 입에 풀칠을 했다. 때문에 한극은 학업을 중단하고 새로 형성된 농촌아르쩰리에서 근무하는 아버지를 도왔다. 그러나 향학열이 높은  한극은 아버지가 허가하자마자 니꼴스크-우수리스크로 공부를 하러 갔다. 그는 1934년에 이 곳 사범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3년동안 공부를 한 후에 한극은 기타 고려인들과 함께 1937년에 시급히 중아시아로 강제이주되었다. 

강제이주당한 최한극의 가정은 타스켄트주 중치르치크구역 <뽈릿옷젤>꼴호스에 오게 되었다. 후에 이 꼴호스는 전 소련에서 명성을 떨쳤다. 최한극이 꼴호스에서 1939년까지 소학교와 중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다음 페르가나 사범대학에서 공부를 계속하였다. 1943년에 졸업증을 받고 <뽈릿옷젤>꼴호스에 돌아와서 계속 교사로 일했다.

1946년에 최한극은 모스크바의 결정에 의해 북조선으로 특별 출장을 보내기 위해 선택한  고려인들의 명단에 들어갔다. 이렇게 그는 우스베키스탄 교육성이 조직한 단기강습을 다니게 되었다. 장학봉이가 쓴바에 의하면 타스켄트에서 진행된 강습소에서 전 공화국에서 온 근 200명의 고려인들이 공부했다. 조선어 소유, 소련공산당 역사 강의, 위대한 나라를 외국에서 당당히 대표할 사명을 지닌 소련공민들의 도덕적심상이 수업의 프로그램에 들어갔다. 양성소를 성과적으로 끝낸 졸업생들을 가족과 함께 모스크바로 보냈는데 그 목적은 평양으로 보낼 후보자를 확정하고 북조선에서 어떻게 행동할데 대한 훈령을 주기 위해서였다. 서류에 따르면 최한극이 1947년 12월 5일에 평양에 왔다 (1952년 1월1일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기관에서 근무하는 소련공민-고려인들의 명단. 로련대외정치고문서 폰드 0102, 목록 8, 공문서 51, 서류철 39, 18페이지). 북조선에 온 최한극은 그가 조선어를 잘 소유한 전문가이기에 교육성 산하 교과서 출판감독으로 임명되었다. 

나라가 대립되는 두 부분으로 분단된 후에 북조선과 남조선 지도부는 자국 무력의 전투력 강화에 중점을 두었다. 그것은 나라를 전쟁의 방도로 통일시키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공군 특히 새로운 형의 전투기 개발에서 본질적인 변동이 일어났다. 문제는 프로펠러형 전투기를 제트형 전투기로 교체하는 것이었다. 모든 최신 군사기재의 다부분이 두 강국 즉 소련과 미국에서 강구 및 제작된 것이 당연한 일이다. 때문에 북조선 공군참모부에 소련 군사고문들이 많았다. 그들이 미래의 북조선  군용비행사 지휘관들과 기술자들을 훈련시켰다. 강습생들에게 군용비행기 조종의 초보적 지식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훈련-고문들 외에 러시아어를 조선어로 번역하는 통역이 필요했다. 그래서 최한극이1948년부터 1950년 초까지 공군 참모부에서 통번역으로 일했다. 그는 자기의 회상기에 아래와 같이 썼다: <하긴 내가 어떤 비행기의 발동기가 어떤 것인지 몰랐지만 휴가도, 휴일도 없이 기술 번역과 통역을 하면서  비행기 발동기의 좋은  지식을 소유했다>. <교육의 요점은 통역자신이 우선 학습자료를 훌륭히 소유하고 나서 다음에 교육시키는 기술인원들을 알아야 한다>고 최한극이 수차 반복하였다. 최한극은 목적지향성, 완강성, 자기 임무에 대한 책임적 태도에 의해 소련항공기술에서 훌륭한 전문가로 되었다. 최한극은 원래 말이 적은 사람이였기에 말하고 교제하는것보다 비행의 발동기를 섬세하게 연구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고 장학봉이 자기의 책에 썼다.

북조선 공군력은 새로 시작을 해야 했다. 그것은 항공대의 모든 하부구조가 반도의 남부에 있었기 때문이다. 북조선 비행사들의 교육은 소련의 비행기술과 훈련자들을 받은 몇 개의 항공클럽을 토대로 시작되었다. 1948년 말에 소련-북조선 혼성 승무단의 첫 비행이 시작되었다.

조선전쟁 시작을 앞두고 전투기들의 수가 급히 뛰여 올랐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군력 총 인원수가 근 3천명에 달했다. 완렌 장령이 공군을 지휘했고 아.웨.뻬뜨라쵸브 대령이 소련군사 고문으로 활동했다. (항공학과 우주비행학, 1991년. 제 2호, 32페이지). 조선전쟁의 공중전에서 미그-15제트 전투기를 타고 전쟁에 참가한 소련비행사들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한해서 결정적 역할을 놀았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1950년1월 27일에 최한극은 습격비행 연대, 전투 및 연습 연대로 이루어진 북조선혼성 비행사단 참모부에서 기술지배인의 직책에 임명되었다. 조선전쟁이 시작되자 소련에서 2-3년 훈련을 받은 북조선 비행사들이 전투에 참가하여 그중 많은 비행사들이 전사했다. 전투가 38선 이북으로 옮겨지고 적군이 평양을 점령함에 따라 살아남은 비행사들과 고장이 나지 않은 비행기들이 만주로 철수되었다. 이곳에 3중 소련영웅인 유명한 비행사 니꼴라이 꼬제두브의 지휘하에 있는 소련 비행사단이 주둔하고 있었다. 최한극은 비행기가 없이 근 100명의 강습생들이 있던 중국 안둥도의 툰후아시에 왔다. 꼬제두브와의 합의하에 툰후아 비행장에서 북조선 비행사들의 합동훈련이 시작되었다. 강습생들은 비행의 이론에 대한 강의를 듣고 비행기의 물질적

부분을 연구하고 비행실습을 하였으며 소소한 고장을 수리하였다.

리론 및 실습 프로그램을 능숙하게 조직하였기에 북조선 강습생들은 짧은 기간 즉 7개월 동안에 자립적으로 비행기를 조종할 수 있었고 기술자들은 비행기와 설비를 비행에 준비할 수 있었다. 북조선 비행사들은 툰후아 비행장 외에 하르빈, 구안줄린, 안산, 상해, 북경, 달랸 기지들과 북조선 비행장 신의주, 순천, 원산, 순안 비행장에서도 연습비행을 하였다.
최한극은 자기가 맡은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하였으며 전쟁시기의3년기간에 기술봉사의 실수로 사고가 한번도 일어난적이 없었다. 그는 항상 겸손하였고 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1953년 7월 27일에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이 체결된후 최한극은 1954년 2월부터 기술부 부장으로 근무했고 1956년 1월부터 1958년 5월까지 항공사령부 기술부령관의 직책을수행했다.

항공기의 전투력과 확실한 기술보장과 통제에 바쁜 나날을 보내는 최한극은  정치적 야망이나 파벌투쟁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인민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할 길을 택한 모국을 돕기 위해 심장의 부름에 따라 북조선에 왔다는 견해를 항상 고수하였다. 그런데 스탈린이 사망하고 김일성의 개인 정권이 튼튼해지자 소련고려인들이 1950년대 후반기에 전개된 <사상적 숙청>, 엄격한 통제와 검열로 하여 불편을 느꼈다. 의심과 위험성을 감촉하는 이런 상황에서 많은 소련고려인들에게는 소련으로 귀국하려는 소원이 생겼다. 자기의 과오를 고백하고 다른 사람들의 좋지 못한 정치적 기분, 수령의 <옳은 방침>으로부터의 임의의 탈퇴를 지적하라는 요구가 회의에서마다 울려났다고 최한극이 회상하였다. 얼마지나지 않아 무자비한 숙청의 결과 항공사단 사령관 완룡, 참모장 김원봉, 군사위원 김태군, 기술부령관 리영수를 비롯한 지도부가 몽땅 교체되었다. 그들에게 다 처벌을 주고 새 지도자들로 바꾸었다. 그로 하여 항공사단 사령부의 분위기가 괴로워졌다.

최한극은 직장과 직책을 여러번 바꾸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1962년에 모스크바로 빠져 나올 수 있게 되었다. 북조선에서 자기의 활동과 북조선 정세에 대한 보고서를 올린 후에 그는 우스베키스탄공산당의 관리하에 타스켄트로 파견되었다.
최한극은 타스켄트에 와서 우선 자신과 안해의 취직, 아이들의 유치원, 학교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가 소련에 귀국했을 때 그는 47세의 청춘이였다. 소련 법에 의해 그가 은퇴하여 연금을 받으려면 또 13년을 일해야 하였다. 그런데  조선에서 전쟁시대에 그가 근무한 년한은 1년을 3년으로 계산하였기 때문에 소원에 따라 6년후에 은퇴할 수 있었다.
최한극은 우스베키스탄공산당 중앙위원회의 파견을 받아 민용항공 관리국 세르겔리지부에 가서 근무하게 되었다. 다음 그를 우스베크민용항공 관리국 책임기사의직책에 임명하였다. 그는 1970년 즉 은퇴할 때까지 이 직책에서 근무했다.
최한극은 북조선에서 돌아온 후 생의 마지막 날까지 모국의 생활과 한반도의 정세에 관심을 돌렸으며 소련-북조선 관계가 어떻게 발전하는가를 알아보았다. 자식들이 회상한 바에 의하면 그는 <레닌기치>신문,  중앙 및 공화국 간행물 매 호를 다 읽었으며 조국이 하나의 나라로 통일될 것을 염원하였다.

최한극은60세를 일기로 1975년 1월 10일에 사망했다. 그는 안해 강순양과 함께 여섯명의 자녀들을 교양하였다. 기사의 주인공은 로동 및 군사 공로로 북조선의 고상한 표창 즉  국기훈장 제 3급, 국기훈장 제2급, 자유독립훈장 제 2급, 군공메달을 받았고 소련정부는 그에게 4개의 메달을 수여했다.

    김 게르만 – 역사학 박사, 교수, 알-파라비 명칭 카자흐국립대 아시아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