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익환 – 교육성 부상, 체코슬로바키아주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사

고문서 자료에는 그의 성명을 러시아 문자로 (….)이라고 쓰고 있다. 그런데 어떤 문자를 다른 문자로 옮겨 쓰는 과학적 규칙과 조선사람의 성명을 러시아어로 쓰는 습관에 따라 쓰는 다른 성명도 있다. 때문에 안드레이 란코프는 성명을 달리 (…)창익환이라고 쓰고 있다. ( 란코프 아. 1956년 8월. <북조선에서의 위기>, 모스크바: 러시아정치백과사전, 2009년). 본 기사에 <장>이란 성을 이용한다. 우리 주인공이 바로 이 성을 이용하였고 자식들도 이 성을 가지고 있다. 장익환에게는 표도르 안드레예비치라는 러시아 이름과 부칭이 있었다.
사진: 평양, 1951년.

유감스럽게도 고문서에는 그에 대한 자료가 적다. 그런데 아버지와 가정에 대한 그의 맏딸 장 갈리나 표도로브나의 회상기가 있다. 갈리나 표도로브나는 어렸기 때문에 생활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과 아버지의 출세에 대해 깊이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이 왜 조선에 있으며 아버지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딸애에게 설명해 주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다. 전통을 본다면 조선인 가정에서 아버지들이 말을 많이 하지 않았으며 자식들의 교양을 안해에게 맡겼다. 안해들은 남편이 무슨 일을 하는가 거의 모르고 지냈다. 게다가 북조선에 파견된 모든 소련고려인들은 조선에서 하는 그들의 활동을 공개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썼다. 그러나 자식들은 물론 자기 아버지를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들은 아버지의 개인 품성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었고 함께 보낸 시간, 여행, 받은 선물을 회상할 수 있었다.

현존하는 자료들이 장익환의 약전의 기본으로 되었다. 장익환은 러시아 쁘리모리예의 한까호수 부근에 있는 촌에서 1918년 12월에 태여났다. 그는 학교를 졸업한 후에 블라디보스톡 사범대학에서 공부하였다. 대략 1934년에 입학안 것으로 가정되고 있다. 그는 고려인들이 원동에서 강제이주되기 전까지 학업을 끝내지 못하고 카자흐공화국 크슬오르다시에서 대학을 필하게 되었다. 1939년에 대학 졸업증을 받아 쥔 익환은 교사의 직업을 전공하였다. 같은 해에 그는 허 시나이다라는 아가씨와 결혼을 하였다. 시나이다 역시 사범대학에서 공부했는데 4학년부터 학업을 중단하게 되었다 - 1940년에 딸 갈리나가 태여났다.         

장익환은 대학을 졸업한 후에 카자흐공화국 악쮸빈스크주 쩨미르 시로 파견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수학교사로 일했다. 그 후에 그는 가족들과 함께 우스토베 부근의 고려인 꼴호스로 이주하여 처음에 교사로 일하다가 후에 교장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1946년에 장익환은 1946년 10월 10일부 러시아공산당 (볼세비크당) 중앙위원회 정치뷰로의 결정에 의해 고려인-전문가들을 북조선에 파견하는 <그루빠 37>명단에 들어갔다. 상기 결정에는 아래와 같이 언급되었다: < 37명의 소련공민 고려인 전문가들을 조선에 보내달라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의 부탁을 충족시킬것. 명단을 첨부함>. 30번쩨에 장익환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1946년 10월 24일에 그루빠가 북조선으로 떠났다. 같은 해 11월 9일에 그루빠가 평양에 도착했다. 근 일년이 지나 장익환의 가족들이 평양에 왔는데 그들은 바놕세, 리문일, 김호의 가족들과 함께 왔다.
 

안해 허차희, 맏딸 갈리나 (1940년생), 딸들 옐레나 (1950년생), 이리나 (1953년생), 뽈리나 (1956년생)와 함께 있는 장익환.
장익환이 북조선에 온후 즉시 그리고 1952년까지 어떤 직책에서 일했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한가지 자료를 보면 전쟁시기 (1950-1953년)에 그가 공업대학 학장으로 근무했다고 지적되었는데 고문서 자료를 보면 1952년 1월 1일 현재 그가 교육성 고등교육 관리국 국장으로 일했다. (러시아 대외정치 고문서, 폰드 0102, 목록 8, 공문서 51, 문서철 39, 16장). 조선전쟁 시기에 그에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군 소장의 군칭을 수여했다. 

장익환이 고등교육 관리국 국장의 직위에 있었을 때 수백명의 우수한 북조선 학교 졸업생들을 소련과 기타 사회주의 나라 대학들에 파견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장래 대학생 선발과 그루빠 편성을 직접 장익환이 지도했다. 1955년 12월 7일현재 고문서 자료를 본다면 1955년에 그가 교육부 부상으로 일했다 ( 러시아 대외정치 고문서, 폰드 0102, 목록 11, 공문서 42, 문서철 64, 46장).

스탈인의 개인숭배를 폭로한 소련공산당 20차 대회 이후북조선에서는 당원들과 국가 기관들에서 사상적 숙청 깜빠니야가 시작되었다. 소련고려인들 앞에는 소련공민으로 남아있느냐 (이것은 신임을 잃었으니 직책을 낯춘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니면 공민권을 바꾸어 조선에 남아있느냐하는 엄격한 조건을 내 세웠다. 

장익환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적을 선택하고 모국에 복무하기로 한 소수의 소련고려인들에 속하였다. 직책에 따라 그는 숙청깜빠니야에 부득이 끌려들어가 일하게 되었고 교육성에 소속되는 기관들의 사업을 검열하게 되었다. 1957냔 5월에 장익환은 평양주재 소련대사관 1등 서기관 게.예.쌈쏘노브와의 담화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학교와 대학 교사들과 대학생들의 일정한 부분이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8월 전원회의 이후에 그리고 웽그리아 사변과 관련하여 정치적 미숙성과 사상적 불확고성을 발휘하였습니다. 수도의 평안남도에만해도 소학교와 중학교 교사 근 3000명을 교체해야 합니다>. ( 게.예.쌈쏘노브 (대사관 1등 서기관)와 장익환 (교육성 부상)의 담화에서. 1957년 5월 23일. 러시아대외정치 고문서. 폰드 0102, 목록 13, 공문서 6, 공문철 72). 이 말은 나라에서 이설의 범위에 대해, 김일성의 측근자들이 이 위험을 심중히 받아들이는데 대해 말해 준다.

1959년에 장익환을 뜻밖에 외무성의 외교사업에 전임시켜 체코슬로바키야주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사로 임명하였다. 그는 1963년까지 이 직책에 있었다. 그의 생활에서 이 시기가 가장 평온했을 것이다: 그의 딸 갈리나가 일년에 두번 즉 방학때마다 부모들을 찾아왔다. 바로 이 년간에 Skoda Type 30E 전기기관차 제작에 대한 라이센스를 체코슬로바키야에서 구매했다. 조선에서 총 150대의 전기기관차를 조립하였다. 아마 이 사업이 대사관과 대사의 협력이 없이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1963년에 장익환을 평영으로 소환하였다. 가는 도중에 그가 모스크바에 들렸다. 그 때 소련에 이미 돌아 온 그의 많은 친구들이 장익환에게 모스크바에 남아라는 충고를 주었다. 그런데 갈리나 표도로브나의 말에 의하면 이상주의자인 그의 아버지는 조국에 계속 몸바치기로 하였다. 그리고 또 한가지 원인이 있었다 – 장애자인 딸 옐레나였다. 그는 조선에서 그가 차지하는 높은 직위가 딸에게 좋은 치료와 간호를 보장하리라고 간주했다. 때문에 그는 평양에 돌아 와서 고급 당 학교를 필하고 출판위원회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안해와 딸 셋 – 레나 (1950년생), 이라 (1953년생), 뽈리나 (1956년생)가 아버지와 함께 거주하였다. 맏딸 갈리나 (1940년생)는 공부를 하기 위해 소련으로 갔다.

1966년 경에 장익환에게 친소 편향에 대한 기소를 씌우고 그를 지방으로 추방했다. 장 갈리나 표도로브나의 말에 의하면 아버지가 탄압당한 후에 부모들과 연계가 끊어졌다. 부모들에게서 편지가 아주 드물게 왔는데 그것도 믿을만한 인편을 걸쳐 보냈다. 그들은 조선국경을 넘어선 후에 그 편지를 우편함에 넣었다. 마지막 편지에 부모들은 몹씨 앓는다고 썼다. 그러나 도와줄 길이 없었다. 시나이다 뻬뜨로브나 (조선 성명 허차희)는 대략 1975년에 사망했다. 그리고 장익환은 62세를 일기로 1980년에 사망하였다.

장 갈리나 표도로브나는 1990년에 소련고려인협회 대표단 성원으로 북조선에 다녀왔다. 그는 25년 이상 만나보지 못했던 여동생들을 만났다. 그들이 많이 늙어보였으나 다 생존이였다. 장애자 레나를 내 놓고는 모두 가정을 이루어 살고 있었다. 레나는 막내 여동생 뽈리나와 탄부도시에서 살고 있었다. 이리나 동생은 농촌에서 살고 있다.

갈리나 표도로브나 자신의 생활이 잘 이루어 졌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에 모스크바 제 1호 의대에 입학하였다. 대학에서 공부하는 중에 출가하여 아들을 낳았으나 학업을 계속하였다. 대학을 필한 후에 삐로고브명칭 병원에 배치되었다. 근 반 세기를 지역담당 의사로 근무한후에 과장으로 일했다. 갈리나 표도로브나는 로련 보건 특수일군이며 공훈 의사이다.    

김 게르만 – 역사학 박사, 교수, 카자흐국립대 중앙아시아 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