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에게는 극복하지 못하는 장벽이 없다

3년전에 우리는 <고려일보>창간 95주년 행사에 모였다. 이것은 고려인들의 생활에서 큰 사건이였다. 고려극장 관람실은 행사에 초대된 귀빈들, 고려인 사회단체 대표들, 독자들, <고려일보> 원로들로 빈 자리가 없었다. 우리의 곁에 앉아 있던 한 원로가 <진 따마라 기자가 누구입니까? 기념행사에 오늘 참석하고 있는 신문사 직원들 중에 보이지 않는데요…> - 이렇게 묻는 것이였다. <저기 앉아있는 분입니다> - 나는 앞줄에 앉아있는 따마라 기자를 가르치면서 대답했다. <그런데 저 분이 러시아계이지 않습니까?> - 원로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계속 묻는 것이였다. <예, 그래요, 우리가 조선 성을 지어주었지요…그런데 왜 묻는 것입니까?> - 우리도 물어보았다. <그 기자가 고려인들에 대한 재미있는 기사를 많이 쓰기에 누군가 궁금해서 물어보았습니다> - 원로가 말했다. 따마라 파싈로바가 우리 신문사에서 근무하기 시작해서부터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한두명이 아니었다. 그러면 아래에 따마라 기자에 대한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자세히 들려주려고 한다.
-원래 기자가 저의 꿈이 아니였습니다. 청소년 시절에 그 시기 생활의 상황에 따라 저의 꿈이 몇번 바뀌였었지요…-따마라 겐나지예브나가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 좀 이상하게 들리지요, 원래 사람들은 하나의 꿈을 안고 그것을 실현하려고 노력하는데요…

…따마라는 딸듸-꾸르간주 안또놉까 촌에서 태여났다. 기 당시에 이것이 아주 작은 촌이였다, 싸만으로 만든 집이 몇채 있는 거리가 하나밖에 없었다. 학창시절은 아만겔듸 촌에서 시작되었다. 따마라의 부모들은 집에서 토끼를 사양하였다. 따마라는 토끼를 먹이고 보살피는 과정에 자연히 집짐승을 사랑하게 되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책가방을 집어 던지고는 즉시 토끼우리로 달려갔다. 토끼들 중에는 따마라가 특히 사랑하는 토끼들이 있었다. 바로 그 때 수의가 되려는 꿈이 생겼다… 

시베리야 태생인 따마라의 아버지 겐나지 빠블로위츠 우쓰찌노브는 당의 과업을 받아 농촌을 건설하기 위해 이 곳에 파견되었다. 그는 새 생활을 건설하려는 열망에 불타는 사람들을 동원시켜 불과 몇 년 기간에 다섯개의 거리를 닦았고 집들도 세웠다. 여기에 아만겔듸 명칭 사탕무우재배 쏩호스가 있었는데 젊은 당원 슬리하 땀시바예바가 이 쏩호스 회장이였다. 그 시기에 쏩호스는 공화국에서 사탕무우의 기록적 수확을 거두었다.  현재 경리가 그의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아들이 쏩호스 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쏩호스의 이런 성과에는 적으나마 이 곳 학생들의 기여도 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여름방학이 시작되자마자 우리는 사탕무우밭에 나갔습니다 – 따마라 겐나지예브나가 학창시절을 회상하면서 말한다 – 저에게 브리가지르의 업무를 맡겼는데 나는 서류도 작성하고 출납실에서 봉급도 받아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어요 – 저의 브리가다에 근 20명이 소속되었었지요. 우리가 9학년 때에 30헥터의 지단을 우리에게 맡겼습니다. 소원하는 7-8학년생들까지 보태니 브리가다원들이 거의 60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탕무우를 솎는 일이 가장 힘들었어요. 특히 첫 솎음 말입니다 – 간격을 엄수해야 했는데 식물 사이의 간격을 성냥갑만큼 두어야 합니다. 나는 쏩호스 일을 하면서 농사군들의 일이 얼마나 힘든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브리가다는 맡은 전야에서 성과적으로 일하여 봉급 외에 상금도 받았습니다. 바로 이 때에 저에게는 농학사가 되려는 꿈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이 꿈도 꿈으로만 남고 말았다. 

 따마라의 아버지는 신문을 애독했다. 구역신문 <스나먀 뜨루다> (<로동의 기치>)에 실리는 기사들을 다 읽었다. 한번은 따마라가 신문 몇 호를 뒤적이면서 기사들을 읽어보았다. 그는 기사들을 읽으면서 자신이 못지 않게 쓸 수 있을것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그래서 사탕무우재배 학생브리가다에 대한 기사를 써서 신문사에 보냈다. 자신이 쓴 기사를 신문에서 본 따마라의 기쁨은 끝이 없었다. 이전에 짤막한 기사를 써본 적이 있지만 그것은 벽신문에 실은 기사들이였다. 그런데 얼마후에 페스포드를 가지고 신문사에 와서 원고료를 받아가라는 통지가 왔다. <기사를 신문에 내 주고 돈까지 주다니…>-따마라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페스포드가 아직 없다고 하니 출생신고를 가지고 오라는 것이었다. 

그후부터 따마라는 학교생활에 대해, 쏩호스 생산선구자들에 대한 기사들을 쓰기 시작하였다. 그는 10학년 때에 전승절에 <벨로루시야, 나의 청춘이여>라는 첫 오체르크를 썼는데 그것은 위대한 조국전쟁 시기에 처녀애로서 빠르찌산 부대에서 싸운 참전자 또롭끼나 여성에 대한 이야기였다. 따마라가 교원대학에 입학하려고 입학시험을 치르었는데 독일어가 약해서 합격되지 못했다. 그러던 중에 그가 공부하던 중학교 교장선생이 전화를 하면서 삐오녜르지도원이나 아니면 소학반에서 대리교사로 일할 생각이 없냐고 물어보았다. 따마라는 오래 생각지 않고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더군다나 교사의 직업을 택하려고 했으니까…

그런데 하루는 우연히 구역신문 사진기자를 만났다. 직외기자로 일해 보라는 것이였다. 이렇게 따마라와 구역신문 <스나먀 뜨루다>의 인연이 더 깊어졌다. 따마라의 창작적 실력을 잘 알고 있는 상기 신문사 부주필의 소개에 의해 1981년에 기자로 취직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학에 입학하려는 결심은 버리지 않았다. 기자의 경험이 있으니 끼로브명칭 카자흐국립대 기자 학부 입학시험을 성과적으로 치르었다. 

따마라 겐나지예브나는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스포츠에(육상경기, 낙하산 뜀, 스포츠체조, 배구, 수상관광 경기 등) 열중하였다. 그런데 그의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 것은 등산이였다. 대학생 시절에 그는 깝까스, 천산의 만슈크 마메또바 봉 (해발 4010메터), 역시 천산의 <대리석 봉> (해발 6000여 메터), 빠미르의 레닌봉 (해발 7130 메터), 한 텡그리봉에도 올랐다.  

-등산은 남자에게도 힘든 스포츠인데 여자의 몸으로서 많이 힘들었을 테지요?

-때문에 남자등산가들은 가능한 여자들을 팀에 넣지 않으려고 합니다. 여자등산가들이 가는 도중에 힘들어서 남자들에게서 뒤떨어지고 눈물을 흘리는 페단도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나는 몸을 단련시키기 위해 스포츠를 많이 했습니다. 아침 일찍 알어나 운동도 하구요. 등산은 저에게 많은 것을 주었습니다. 기타를 타는 것도 배우고요 응급치료를 하는 것도 배웠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격을 단련시켜 주며 호상원조의 의의와 단결심, 진실한 우정을 절실히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등산을 하는데 부모들이 말리지 않던가요?

-부모에게 말하지 않았지요, 알았으면 큰일 났었지요. 그런데 한번은 등산용 배낭을 헛간에 감추어 두었는데 아버지가 어떻게 그것을 열어보았어요. 그래서 <저 배낭속에 왠 쇄빙용 도구 (등산용), 바줄, 갈고리가 들어있는거냐?>고 엄격한 목소리로 물어보더라구요. 그래서 여행용 배낭이라고 부득이 속이게 되였지요. 

등산에 대한 말이 났으니 말인데 따마라는 미래의 남편과도 등산에서 만났다. 그 때 알마아타 체신전문학교에서 공부하던 레나트도 등산을 좋아했기에 그들의 인연은 등산과정에 깊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보통 말하듯이 운명을 피할 수 없으니까…

따마라가 등산을 다녀온후 일주일이 지나면 <레닌스까야 스메나>신문 (그는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이 청년신문에 종종 투고하였다)에 등산에 대한 글과 시들이 나타났다. 산봉에 올라 솜 같은 흰 구름이 둥둥 떠 다니는 산들을 바라볼 때 그 아름다움을 묘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86년에 대학을 필한 따마라 겐나지예브나는 딸듸꾸르간 주신문 <사랴 꼼무니스마> (<공산주의 서광>) 신문에 파견되었다. 2년간 근무한 후에 그를 당학교 학습에 보냈다. 기자의 독특한 실력을 보인 따마라 겐나지예브나를 공화국 신문 <카자흐스탄스까야 쁘라우다>사에 초대했다. 이 신문사에서의 근무년한은 12년이다. 

2015년에 <고려일보>에 취직한 따마라 겐나지예브나는 고려인 주인공들에 대한 기사들을 재미있게 쓰면서 독자들의 좋은 평을 받고 있다. 얼마전에 있은 신문사 직원들과 기술학 박사 박 이완 찌모페예비츠와의 상봉회에서 따마라에 겐나지예브나 대한 다음과 같은 찬사를 들을 수 있었다:

-따마라 겐나지예브나가 쓴 기사들을 읽기가 항상 재미있습니다. 이런 기사들은 기억속에 오래 남아있습니다. 이것은 저의 의견만이 아닙니다. 독자 다수가 이렇게 평가합니다 – 이완 찌모페예비츠가 말했다.

따마라 겐나지예브나는 특히 고려극장에 대해 쓰기를 좋아한다. 그는 연극을 하나도 빼 놓지 않고 다 구경하며 초연이 있을 때면 그 연극에 대한 자세한 평도 쓴다. 아마 그를 고려극장의 직외기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따마라와 레나트는 훌륭한 아들 딸을 자래웠다. 알리예브명칭 카자흐스탄-러시아 의대를 필한 아들 레나트는 현재 석사과정을 공부하고 있다. 알마티 동력 및 체신 대학 기구제작부를 졸업한 딸 알리나는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따마라 겐나지예브나는 이미 2년째 한글을 배우고 있다. 직장을 지키고 살림살이에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도 한국어 수업을 하루도 빼놓지 않고 열심히 수업 (지금은 물론 온-라인 수업)에 참가한다. 멀지 않은 장래에 따마라 겐나지예브나가 우리와 한국어로 자유롭게 회화를 하리라고  믿는 바이다.  
          

남경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