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빈 – 행방불명이 된 조선로동당 도위원회 위원장

1950-60년대에 북조선에서 근무한 소련고려인들 중에서 허비의 이름은 보다 널리 알려진 사람들의 이름의 그림자에 가리워져 있었다. 게다가 그의 성명을 어떤 경우에는 호빈 혹은 혼삔이라고 썼으니 같은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한국언어학에 대한 일정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허빈에 대해 알려진 것이 적다. 한국어로 된 장학봉의 책에 간단한 경력이 들어 있다. 안드레이 란코프는 자기의 책에 그에 대해 가볍게 상기시키고 있다. 그런데 란코프는 그를 호삔이라고 쓰고 있다. 허빈의 손자들인 허 왈렌찐과 허 왈레리에게 있는 귀주한 자료와 로련대외정치 고문서 보관소에 보존된 불완전한 자료에 의해 사진을 담은 약전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두가지 서류에 허빈에 대한 가장 확실한 자료가 기록되었다: 이것은 적기훈장 수훈 원동군구 제 2 비서 아.세르쥬꼬브가 1956년 2월에 싸인한 <비밀>이라고 기록된 증명서와 평양주재 소련대사관 웨.이와녠꼬 영사가 싸인하에 1952년 10월에 내 준 평정서이다. 이 두 서류에는 허빈이 1912년 11월 30일에 함경북도 길주군의 빈농의 가정에서 태여났다고 지적되었다. 1919년에 부모들과 함께 러시아의 연해주로 넘어왔다. 그의 부모들은 소베크정권이 수립되기 전까지 임대한 한 조각의 땅에서 힘들게 농사를 지었다. 1922년에 가정이 토지를 분배받았다. 집단화가 시작되자 가장은 1930년에 꼴호스에 들어갔다. 일부 자료에 의하면 허빈이 처음에 사범전문학교를 필하고 깔리닌쓰끼 구역 <5.1절>꼴호스 중학교에서 교사로 일했다. 1937년에 25세였던 허빈은 블라디보스톡 조선사범대학에서 공부하였다. 그러나 얼마지나지 않아 그는 다른 고려인 교원, 대학생들과 함께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되었다. 1939년에 허빈은 크슬오르다에서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교사로 일했으며 다음에는 교장으로 근무했다. 1942년에 그를 전러공산당에 받아들였는데 당에 추천하는 그의 평정서에는 그가 크슬오르다주 싀르다리야구역 중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면서 모범을 보였다고 지적되었다. 그의 반과 전 학교 학생들의 성적률이 높았다.

1942년에 허빈이 군대에 징병되었다. 아마도 노동전선에 동원된것 같다. 그가 노동전선에 징병되어 어느 곳에서 일했는가하는 자료가 없다. 그런데 위대한 조국전쟁에 참가한 소련고려인들에 대한 책에도 복무한 자료가 없다. 1945년에 허빈이 평화로운 생활에로 돌아와 전 직장에서 근무했다.

1946년에 그는 북조선에 파견할 소련고려인 후보자로 뽑혔다. 1946년 10월 24일에 허빈을 <그루빠 37>의 성원으로 평양에 보냈다. (1946년 10월에 외국에 간 정치망명가들의 명단. 최근 역사문서 보관 및 연구 러시아 센터, 폰드 17, 목록 130, 공문서 20, 116페이지).

허빈은 조선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문화부상의 직책을 차지했으며 다음 평안북도 행정중심지 신의주 시에서 사범대학 총장으로 근무했다. 임의의 사업에서 자기의 지식과 조직자적 능력을 발휘한 그는 조선로동당에 입당하였다. 조선인민군이 퇴각하였을 때 신의주가 소개된 정부를 받아들였는데 북조선 지도부가 1950년 9월에 허빈을 도 당단체 지도자로 임명한 것이 우연한 일이 아니다. 

1950년에 신의주와 그의 주변이 조선인민군과 그들을 지원하기 위하여 온 중국군 부대 (소련 사료편찬에는 그들을 <국제주의 의무를 수행하는 지원군>이라고 쓰고 있다)에 한해서 중요한 전초로 되었다. 북조선과 중국간 국경이 …강 수역을 따라 지나가기에 중구군, 군사기재, 장비를 이송함에 교량이 아주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었다. 중국 도시 안둔과 북조선의 신의주 간에 가장 중요한 자동차 및 철도 교량들이 있었다. 모든 교량의 길이가 1킬로메터 이상이 되었다. 때문에 이 다리들과 도로가 공중에서 판을 치던 미공군 비행기들의 폭격의 첫 대상으로 되었다. 전투작전을 주시하던 모스크바는 특별히 편성된 제 64 독립 특수 항공군단을 동북중국으로 파견했다. 이 군단을 이.웨.벨로브 소장이 지휘하였다. 소련전투기들은 교량들을 보존함에서 결정적 역할을 놀았다. 교량은 파괴되지 않았지면 미공군 비행기들이 도시의 하부구조를 폭격하였으며 많은 도로들이 파괴되었다. 평안남도 지도부와 도당위원회 위원장에게는 운수도로를 유지하며 식료품을 보장하며 의료봉사를 조직하는 등 기타 많은 생활상 중요한 문제 해결하기 위한 어려운 과업을 수행하게 되었다. 1951년 중순에 도의 지도사업을 능숙하게 헌신적으로 실천한데 대해 허빈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결정에 의해 제 2급 국기훈장으로 펴창되었는데 이는 나라의 최고 표창이다. 후에 그는 두번째 표창 – 제 1급 국기훈장을 받았다.

전쟁이 끝난후인 1954년에 허빈에게 다시 형성된 황해북도 로동당위원회를 맡겼다. 근무상 이와 같은 전임은 북조선 지도부와 김일성이 허빈을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허빈의 지도하에 새 도가 전쟁의 페허에서 일떠서서 나라공고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리라는 희망을 표명하는 것이다. 
사진: 조선로동당 도위원회 위원장 허빈 (첫줄 중간에)이 중국대표단과 함께

허빈은 당 사업에서 성과적으로 출세하였다. 1956년 2월 14-25일에 모스크바에서 진행된 소련공산당 제 20차 대회 대표단 단원으로 허빈을 추천한 것이 이것을 증시하여 준다. 조선중앙 통신과 소련통신의 뉴스에 이에 대해 보도하였다: <평양 1956년 2월 2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최용건 (대표단 단장),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장 리허순, 조선로동당 황해북도 위원회 위원장 허빈을 성원으로 하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대표단이 소련공산당 제 22차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오늘 평양에서 모스크바로 떠났다. 대표단 성원에는 소련주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사 리상조도 들어갔다.

허빈은 소련과 동방블럭 나라들에 한해서 전환적이였던 대회에 참가하였다. 소련공산당 제 20차 대회에서는 스탈린의 개인숭배를 노골적으로 비판했으며 두 정치체계간 평화적 공존원칙을 선포했다. 20차 당대회 총화는 세계 공산주의 운동에서 분열의 원인으로 되었다. 중국공산당과 조선로동당은 모스크바의 새로운 정치적 로선을 받들지 않았다. 북조선에서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소련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간 관계공고화를 위해 사업하던 소련고려인들이 부득이 중간에 끼워서 진퇴가 어렵게 되었다. 그들은 어느 편인가를 선택해야 하였다. 

대표단이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후에 1956년 4월 23일부터 29일까지 평양에서 조선로동당 제 3차 대회가 진행되었다. 이 회의에서 당 지도기관 성원이 변경되었다. 중앙위원회에 있던 14명의 소련고려인들 중에서 9명이 남았는데 그 중에 호선으로 보결된 허빈이 있었다.

모스크바에 충직하고 김일성을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비판한 소련고려인들에 대한 관계가 날로 악화되어 갔다. 자기 부하들에게 <해로운 사상>을 <전염하지> 않도록 허빈을 도 지도직책에서 해임시켰다. 1958년 2월에 허빈을 폴스카주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사로 파견했다. 그런데 12월에 아무런 설명이 없이 그를 평양으로 소환하였다. 평양에 돌아온후 3일동안 허빈과 담화를 하였다.결국 수도로부터 먼 곳에 있는 항구도시 청진 공장의 당단체 비서로 파견하였다. 1959년 말에 폴스카에서 돌아 온 허빈이 사상적 숙청을 당했다고 장학봉이 쓰고 있다. 1960년에 검열이 끝났는데 그 후에 허빈이 행방불명이 되었다. 허빈이 살아남았는지 아니면 1960년에 죽었는지 아직까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장학봉, 738-739 페이지).

허빈은 심중한 기소를 받은 다른 소련고려인들을 아주 혹독하게 처벌한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안해 박 시나이다와 함께 어린 자식들을 소련으로 보내기로 했다. 맏아들 윌렌은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그보다 먼저 소련으로 갔었다. 허빈의 부인은 아이들을 크슬오르다에서 사는 언니에게 데려다 놓고 자신은 남편이 있는 평양으로 다시 돌아왔다. 

남편과 자식들이 없이 혼자 남은 박 시나이다는 자식들과 함께살기 위해 소련에로의 귀국허가를 달라고 북조선 정권에 수차 청원서를 썼다. 그러나 매번 거절을 받았다. 자식들도 어머니를 만나러 갈 수 없었다. 박 시나이다는 북조선에서 홀몸으로 온갖 시련과 불행을 꺾으면서 거의 30년이란 긴 세월을 보냈다. 박 시나이다는 아마도 1988년에 사망한 것 같다. 그 해에 보낸 소포가 <수신인이 없다>는 글이 적혀 되돌아왔기 때문이다.

사진: 왼쪽으로부터 – 딸 허 옐레나, 허빈의 어머니, 허빈, 부인 박 시나이다, 딸 허 스웨틀라나. 뒤에 서 있는 청년이 아들 허 윌렌. 1945년, 황해북도의 행정중심지 사리원에서.

 허빈과 박 시나이다의 자식들 넷이 다 자라나 고등지식을 소유하고 사회의 당당한 인물들로 되었다. 맏아들 윌렌과 딸 옐레나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아들 허 왈렌찐은 1998년에 러시아로 이주하였고 딸 스웨틀라나는 알마티에서 살고 있다. 

김 게르만 – 역사학 박사,

알-파라비 명칭 카자흐국립대 한국학 센터 소장,

교도 종합대학 동남아시아 연구 센터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