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히준 – 간부 관리인, 부상

리히준은 아무르강 상류 사마르까 (조선어로는 삼만리) 강연안에 1871년에 창시된 블로고슬로웬노예 촌에서 1906년 1월 13일에 태여났다. 연해주에서 이주해 온 한인 가족 103 가호가 새 촌의 첫 주민들로 되었다. 한인들이 러시아정교에 들어 가 <축복>을 받은 후에 농촌을 개칭했다. 리히준이 태여날 무렵에 블라고슬로웬노예 촌에는 근 2천명의 한인들이 살고 있었다. 이것은 러시아정교의 세례를 받은 한인 거의 전부이다. 때문에 리히준에게는 와실리라는 러시아 이름이 있었고 부칭은 찌모페예비치였다. 이것은 두 개의 교회와 세 개의 학교가 있는 큰 촌이였다. 1919년에 블라고웨센스크로 이주하기 전에 그중 한 학교에서 와실리가 공부하였다. 블라고웨센스크에서 그는 중학교와 김나시야를 필했다. 가정형편이 어려웠기에 와실리는 하바롭스크에 가서 학업을 계속하지 못하고 부득이 일하게 되었다.

조선전쟁 시기의 리히준

리히준이 어디에서 공부했는가에 대한 정확한 자료가 없다. 그의 아들 리 블라지미르가 우리와의 담화에서 아버지가 재정대학에서 공부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아들 (?)의 말을 듣고 장학봉이 알마티에서 1991년 10월 22일에 기록한 수필 (장학봉, 350-351 페이지)에 와실리가 1932-1933년에 하바롭스크에서 공부했다고 쓰고 있다. 그러면 그가 대학에서 공부할 수 없었다. 그러니 와실리가 경리나 재정일군 강습을 필한 것이 옳을 것이다. 전문지식을 소유한 리 와실리는 원동에 살던 고려인들과 함께 그의 가족이 강제이주되기 전까지 즉 1933년부터 1937년까지 구역재정부에서 근무했다.

그의 가정은 나마간시에서 살게 되었다. 그런데 강 라드미르는 리 와실리가 <나만간 재정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재정부 감독관으로 파견되었다>고 옳지 않게 썼다 (강 라드미르, 211-212 페이지). 왜냐 하면 그런 교육기관이 나만간시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정부에서 일했다는 것은 현실에 맞는다. 그의 첫 직장이 주 소비조합동맹이라고 상기되었다. 지도부는 성실하게 일하는 젊은 전문가에게 주목을 돌렸다. 리 와실리를 당사업에 파견하였다. 장학봉이 쓴바에 의하면 그를 나만시당위원회 조직부 부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런데 강 라드미르는 와실리를 나만주당위원회 인사과 지도원으로 취직시켰다고 썼다. 리 와실리가 어디에서 어떤 직책을 차지했던지간에 이것이 성공이였다. 그것은 강제이주된 민족의 대표를 당기관에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리 와실리가 볼세비크공산당에 입당한 증거 서류를 아직은 찾지 못했다. 그런데 시당위원회나 주당위원회의 지도직책에 비당원을 임명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초보적 논리가 암시하여 준다.

1945년 9월에 리 와실리 (리히준)를 붉은 군대에 징병했다. 그는 북조선으로 출장을 보내는 소련고려인들로 이루어진 그루빠<57>에 속하였다. 당 사업의 경험이 있는 그를 평안북도 조선로동당 신의주시위원회 부위원장의 책임적 직책에 임명하였으며 그 후에는 함경북도 청진시당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전임시켰다.

1950년에 전쟁을 앞두고 리히준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간부 총관리국 국장으로 임명했는데 이로 하여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간부정책 형성 분야가 그의 손에 들어 갔다. (1952년 1월 1일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기관들에서 근무하는 소련고려인들의 명단. 로련대외정치 고문서 보관소, 폰드 0102, 목록 8, 공문서 51, 철 39, 11 페이지).

전쟁 시기에 리히준에게 책임적 직책을 주었는데 조선인민군 인사과 과장이었다. 보존되어 있는 자료를 본다면 사무실에서 서류를 가지고 하는 일이 그의 천직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 하면 그에게는 한 자리에 앉아서 사람들과 적게 접촉하면서 하는 일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누가 누구이고 문관직이나 군대복무 과정에 누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잘 기억하고 있었다고 지적한다. 조선전쟁을 끝낸 정전협정이 서명된 후에 그에게 내각 간부관리 지도사업을 맡겼다.

1958년에 뇌출혈이 있은 후 건강상태가 나빠짐에 따라 리히준을 다른 사업에 전임시켰다. 그런데 이것도 책임성이 큰 직책인데 조선로동당 당통제위원회 위원장의 직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한 소식통에 의하면 다음 해에 그를 사회보장 부상으로, 다른 소식통에 의하면 공공경리성 부상으로 임명했다. 북조선에서 그가 맡았던 마지막 직책은 조선로동당 검사위원회 위원장이다. 1960년 초에 리히준이 오랫동안 치료를 받게 되었는데 그는 평양, 북경, 모스크바에서 건강을 회복하려고 했으나 별로 효과가 없었다.

1962년 2월에 리히준이 소련에 귀국했다.  그는 여러가지 원인으로 북조선에 남아 있었던 소련고려인들중 한 사람이었다. 아들 리 블라지미르의 말에 의하면 리히준의 소련귀국 문제에 그의 사촌형 리동화가 영향을 준 것 같다. 김일성은 리동화에게 긍정적으로 대했다.

리히준이 알마아타로 왔을 때는 그가 중병으로 앓고 있었으니 어디에서도 근무하지 않았다. 그는 1966년 6월 20일에 사망하였다. 리히준은 알마아타시 중앙 공동묘지에 안치되어 있다. (리히준의 아들 리 블라지미르와의 담화 기록, 알마티, 2001년 12월 11일. 아.이.란코프).

리히준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세운 공로로 하여 6개의 훈장과 많은 메달로 표창되었는데 그 중에는 <국기훈장> 1, 2 급, <자유와 독립>훈장, <로동 훈장>도 있다. 그는 소련메달들로도 표창되었다.

리히준의 부인 리 (오가이)안나 스쩨빠노브나 (1905-1972)는 나만간부터 시작하여 남편과 생의 길을 같이 걸어왔다. 안나 스쩨빠노나는 남편을 떠나 보낸후 6년후에 사망하여 역시 남편의 곁에 안치되었다. 그들 사이에 딸 리 마리야 와씰리예브나와 아들 리철 (왈레리얀 와실리예비치)이 있었는데 딸의 남편 김 블라지미르 블라지미로비치는 고려인들 사이에서 이름있는 카자흐스탄 작가였다. 아들 리철은 몇년전에 사망하고 그의 안해는 알마티시의 한 병원에서 안과의사로 근무하고 있다.                                                                        

김 게르만 – 역사학 박사,

알-파라비 명칭 카자흐국립대 한국학 센터 소장,

교도 종합대학 동남아시아 연구 센터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