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이완 – 장갑땅크 및 포병군 장령

천 이완 알렉산드로비치는 1919년 10월 1일에 러시아에로 넘어 온 한인이주민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여났다. 출생지는 포시예트구역의 슬라뱌놉까 촌이다. 이완은 촌 소학교에 입학하여 1932년에 졸업한후 1935년에 농민청년들을 위한 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하였다.

다음 천 이완은 16세에 니꼴스크-우수리스크 조선사범 전문학교에 입학하여 1937년 가을까지 공부했다. 원동에서 고려인들이 강제이주된 결과 조선사범전문학교의 모든 학생들이 카자흐소베트사회주의공화국 크슬오르다주 카살린스크시에 오게 되었다. 천 이완은 이 곳에서 사범전문학교를 졸업했다. 그러니 그는 모국어로 공부를 한 것이다.

통례로 사범전문학교 졸업생들을 학교들에 배당하였다. 그들이 조선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쳐야 하였다. 그런데 천 이완을 다른 운명이 기대하고 있었다. 천 이완의 말에 의하면 그가 이미 원동에서 살았을 때 롱구선수단 팀장으로 훌륭한 스포츠맨의 실력을 보였다. 때문에 이름있는 선수를 크슬오르다 전 조선사범대학이 원했다. 결과 그를 지리학부에 받아들였다. 이완은 4년동안 이 대학에서 공부하여 졸업증과 함께 학교교사 파견장을 받았다. 

1942년에 천 이완은 우스베키스탄의 타스켄트주 중치르치크구역 까라수 중학교에서 지리를 가르쳤다. 역시 이 학교에서 1938년부터 그의 형 천률이 문학교사로 근무했다. 운명의 시킴에 따라 두 형제가 후에 북조선에 가게 된다.

23세의 이완은 농촌의 인기있는 총각이였다. 딸이 있는 가정에서는 다 이완을 사위감으로 보았다. 그런데 19세의 강 니나가 그와 약혼했다. 니나는 뽀시예트구역 바라바스 촌의 교사의 가정에서 태여났는데 지식도 있고 미모가 뛰여 난 처녀로 소문났다. 1942년 11월 22일에 그들이 결혼하고 친척들을 초대하여 결혼잔치도 차렸다.

젊은 부부는 전쟁시기에 꼴호스에서 살았다. 1945년 10월에 천일 (이완)이 타스켄트주 군사동원부를 걸쳐 선출되어 북조선에 급히 파견되었다. (로련대외정치 고문서, 폰드 179, 목록 10웨, 공문서 19, 문서철 1, 45페이지). 북조선에 와서 그는 안드레이 로마녠꼬 소장이 지도하는 소련군정 민사관리국에서 통역으로 근무했다. 북조선의 새 지방정권에 협조하는 것이 민사관리국의 기본 과업이였다.

1946년 봄부터 그는 창립되고 있는 조선인민군 통역으로 근무했는데 이 때 그에게 대령의 군칭이 수여되었다. 1947년 3월에 천일은 조선인민군 체육부장으로 임명되면서 소좌의 군칭을 받았다. 다음 그의 군사출세가 한 기간 중단되었다. 1948년 봄에 그는 내무성에서 통역으로 일했고 일년후에는 원산시 농업대학 부지배인으로 파견되었는데 일년후에 그의 문관직이 끝났다. 조선전쟁 직전에 그는 대좌로 조선인민군 장갑땅크군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로동년한에 대한 증명서. 조선인민군 인사과 과장. 30. 09. 1960. 정문익 싸인. 조선어 번역을 평양주재 소련대사관 영사처가 확인> 김 게르만 니꼴라예비치 서류보관함).

조선전쟁 시기 즉 1952년 4월에 천일이 대좌의 군칭을 가지고 북조선인민군 포병대 관리국에 전임되었다. 천일은 1960년 6월까지 북조선인민군 포병대에 대한 책임을 졌다.  
스탈린이 사망한 후에 북한에서는 소련고려인들 사이에서 변동의 냉기를 느끼게 되었다.  1950년 중순에 당, 중앙 및 도 관리기관들과 군대에서 숙청이 시작되었다. 다음 공장과 기업소 지배인들, 교육, 문화, 보건 기관 지도자들이 숙청의 소용돌이에 끌려 들어갔다. 또한 지방 공산당원들, 이전 중국 빠르찌산들 그리고 모스크바의 <큰 형> (이 시기에 이르러 사망한)이 보내온 사절들인 -  소련고려인들도 숙청을 면하지 못했다.

1958년 여름에 천 이완의 동생 천률의 사상적 검열이 시작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천 이완은 형에게 어떤 죄를 들씌우며 그 후과가 얼마나 위험한가를 알기 위해 지역으로 갔다. 이에 앞서 천일은 평양에 다녀 온 자기 안해에게서  소련에로의 귀국에 대한 동생의 의도를 알아보려고 하였다. 장학봉이 기록한 증언에 의하면 천 이완은 소련대사관에 신청서를 올릴데 대한 동생의 시도를 받들지 않았다. 그것은 당시 조선인민군에서 높은 직위를 차지하는 그에게 한해서 이것이 아주 위험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천 이완이 평양에 돌아오자 그 자신이 검열을 받게 되었다. 그에게 이미 소련고려인들을 반대하여 제기하는, 틀에 박힌 죄를 들씌웠다: 소베트사상에 대한 신봉, 모스크바에 대한 충성, 기소를 받는 자 자신과 그의 가족들의 북조선 공민권 거절, 북조선 정체 그리고 직접 수령을 반대하는 비판적 진술 등이었다. 천 이완이 사무실에 <쁘라우다>신문철을 두고 정기적으로 읽는것을 그의 잘못의 증거로 제기했다 (장학봉).

일부 기소는 황당무계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그가 1945-46년에 소련군복 혹은 평복을 하고 다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5명의 다른 소련고려인들과 함께 평양의 중앙지역에 집을 임대하여 이웃을 하고 지냈는데 그 곳에 상점과 술집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니 그들이 술집에 자주 드나들었다는 것이었다. <예심원들>은 이전에 천 이완과 이웃을 하고 지내던 사람들을 찾아가서 의심스러운 것을 보거나 듣지 않았는가고 묻건 하였다. 천 이완을 날마다 불러 심문했다. 심문은 몇시간씩 계속되었고 때로는 밤늦게까지 끌었다. 사상적 숙청에 관한 조사를 받고 있는 자들의 집과 아파트를 감시하면서 <당의 신임을 잃은 자>들의 집에 누가 무엇하러 왔다갔는가를 다 기록했다.

천 이완에게는 의심을 받는 다른 고려인들에 비해 일정한 우월점이 있었다. 왜냐 하면 그는 이전 빠르지산들과 젊은 강습생들에게 현시 조건에서의 전쟁방법과 리론을 수년간 가르쳤기 대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소련군사기술을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은 조선인민군에 한해서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많은 고위급 군사 및 민사 관리들이 천 이완의 제자들이였는데 그들 사이에서 선배에 대한 평판이 좋았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안전위원회를 지도한 김일성의 가까운 전우인 김창범 소장을 천 이완의 운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고위급 관리들중 한 사람으로 지적할 수 있다. 김창범의 모스크바 방문시에 천 이완이 그와 동행한적이 있었다. 하긴 김창범이 조사과정에 참견하지 않았지만 조사를 받고있는 자들에 대한 국가안전기관 지도자의 태도를 알고 있었기에 포병부대에서 검열이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천 이완에게 직접 책임을 묻는 기소가 제기되지 않았다.

1959년 말기에 천일의 동생 천률에 대한 사상적 검열이 끝났다. 그리하여 그는 <사상적 재교양>을 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친소분자>라는 딱찌는 그에게 남았다. 소련대사관과 북조선 국가기관들이 소련귀국 허가를 내 주었다. 이런 전환은 천 이완의 문제를 긍정적으로 해결하는데 긍정적 영향을 주었다.  3개월의 조사 후에 천 이완에 대한 모든 기소를 취소했다.

다음 오래 기다렸던 소련귀국을  준비하였다. 결국 1959년 12월 17일에 천 이완은 가족들 – 안해 강 니나 야꼬블레브나와 자식 6명과 함께 평양역을 떠나 모스크바로 향했다. 그의 동생 천 률도 그들과 한 차에 탔다. 두 형제는 소련정부의 의사와 심장의 부름에 따라 15년을 북조선에 바쳤다. 그들은 조선이 일제식민주의자들로부터 해방된 시각부터 조선전쟁이 긑난후 나라가 복구될 때가지 북조선에서 활동했다.

오래동안 기차를 타고온 후에 두 가정이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천 이완은  우스베키스탄으로 파견되었다.  그는 우스베키스탄에  오자마자 즉시 국가에서 주택을 받았다. 1961년 7월부터 그는 우스베크소베트사회주의공화국 원유 및 가스 공업성 공급부 부장으로 일했다. 다음 1967년 7월에 건설성 건설설비 관리국 국장의 직책에 전임되어 1979년까지 근무하다가 60세가 되자 은퇴했다. 천 이완은 은퇴한 후에 부인과 함께 요양소와 휴양소를 다니면서 쉬였으며 한번은 와르샤와 동맹국의 한 나라에 외국관광도 다녀왔다. 자식들이 회상하는바에 의하면 아버지가 때때로 북조선을 회상했으며 또 한번 조선에 가 보기를 원했다. 그런나 통일된 모국의 변모를 보려는 것이 그의 꿈이였다. 최근 년간에 그는 고혈압으로 고통을 느꼈는데 1989년 10월 10일에 고혈압으로 사망하였다.  그는 안해와 자식, 손군들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조선인민군 소좌에게 소련국가 표창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표창이 있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언제 어떤 표창을 받았는데 대한 자료는 찾아보지 못했다.

김 게르만 – 역사학 박사,

알-파라비 명칭 카자흐국립대 한국학 센터 소장,

교도 종합대학 동남아시아 연구 센터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