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게오르기 이와노비치 – 여러가지 직업을 바꾼 교사

동생 전동혁과 달리 전 게오르기 이와노비치의 경력의 많은 부분이 밝혀지지 않은 것으로 남아 있다. 그 원인은 전 게오르기에 대한 자료가 그의 딸 전 예브게니야 게오르기예브나의 소책자에만 남았기 때문이다. 딸은 가족들을 위해 적은 부수로 소책자를 발행하였다. 얼마 지나서 그것이 koryo-saram. 홈페이지에 떴다. (정 예.게. 시대의 연계 – hups://koryo-saram.ru/svyaz-vremen/) 저의 개인 고문서에는 안드레이 란코프가 <우스베키스탄공산당 상-치르치크 구역당위원회가 작성한 전 게.이.의  등록 카드를 인증하면서 작성한 기록이 보존되었다. 안드레이 란코프, 장학봉, 강 라드미르 혹은 이고리 셀리와노브가 쓴 전 게오르기에 대한 자료들이 전혀 없기 때문에 오직 이상에 지적한 두가지 원천에 따라서만  전 게오르기의 경력의 진실을 대비해 볼 수 있다. 

전 예브게니야의 회상기에는 소소한 부분들이 많다. 그는 아버지의 직장과 직책을 꼼꼼히 다 기록하였다. 전 게오르기는 북조선에 가기 전과 갔다온 후에 직장을 자주 바꾸었다. 그런데 이에 있어 그의 략전에서 아주 중요한 사건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게오르기가 어떻게 되어 모스크바 항공대학 노동자예비학부에서 공부하면서 동시에 오렌부르그에 있었을 수 있으랴? 그리고 왜 게오르기가 고려인들의 1937년 강제이주 전에 즉 1933년에 우스베키스탄에 있게 되었는가? 그가 북조선에서 소련에 속히 귀국한 진짜 원인이 무엇인가?  그가 평양에서 돌아온 후에 거주지와 일자리를 왜 자주 바꾸었는가? 그의 안해와 자식들이 게오르기와 함께 북조선에서 거주하였는가? 이 모든 질문들에 아직은 답을 줄 수 없다.

전 게오르기 이와노비치의 딸 예브게니야가 기록한바에 의하면 게오르기가 1905년 (태여난 날자와 달은 알 수 없다)에 쁘리모리예변강 스꼬똡까구역 시트호이 촌에서 태여났다.  그는 부유한 조선인 어부의 가정에서 태여났는데 가정에는 어선이 있었다. 등록카드에는 사회적 출신이라는 난에 <농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게오르기는 태여난 후에 러시아 정교에서 세례를 받았으며 러시아어로 교육하는 중학교 (김나시야)를 졸업했다. (정 예.게. 시대의 연계. – https://koryo-saram.ru/svyaz-vremen/) 그는 1920년 말부터 1926년까지 시트호이 촌의 <크라스나야 스왜즈다> (붉은 별) 어로 아르쩰리에서 일했다. 다음 블라디보스톡의 근교의 세단카시 성냥공장에서 포장공으로 근무하였다. 그후에는 이만시 담배공장에서 담배를 채워 넣는 일군으로 일했다. 게오르기는 쁘리모리예 주의 <크라스늬 뻬레왈> (붉은 고개) 꼴호스 촌 소비조합 판매점에 취직하기 전까지는 이상에 지적한바와 같이 임시 돈벌이를 하게 되었다. 그는 1925년에 공청동맹에 입맹하였다. 

1928년에 그는 오렌부르그시 노동자예비대학에 입학하였으나 한 학기만 공부하고 다시 일을 하게 되었다. 1930년 3월에 게오르기는  전러공산당 후보당원으로 되었으며 1931년 10월에 당증을 받았다. 

확인되지 않은 원인에 의해 전 게오르기가 1933년에 우스베키스탄에 와서  1934년까지 공화국 과실애채 판매부에서 생산계획작성원으로 일하기도 하고 연료기지 서기로도 근무한다. 체육아카데미야에서 한 학기를 공부한 후에 타스켄트 사범대학에 입학하였다. 1937년에 대학졸업장을 받은 게오르기는 우스베크공화국 교육인민위원부 인사과 감독관의 직책에 임명되었다.

1938년 9월부터 두 학습년도를 페르가나주  마르겔란시 제 1호 중학교 교무주임으로 일했다. 1940년에 타스켄트에 돌아 온 그는 2년간 주 문학 및 출판 관리국 전권대표로 일했다.

위대한 조국전쟁이 시작되자 <꼴호스에서의 그의 사업시기>가 시작되었다: 1941년 말기부터 1942년 5월까지 상-치르치크구역 <크싈-뚜>꼴호스에서 꼴호스원으로 근무했으며 전쟁 말기까지는 타스켄트주 중-치르치크구역에 있는 <조선>꼴호스들에서 여러가지 직책을 차지하였다. 

모든 것을 본다면 전 게오르기는 북조선에 파견될 준비사업과 연관된 강습을 다니기 위해 1945년 여름 혹은 이른 가을에 모스크바에 갔다. 강습을 끝내고 퍙양에 온 그는 1945년 12월부터 1946년 4월까지 즉 반년이 채 되지 않는 기간에 제 25소련군 정치부에서 통역강습을 지도했다.

다음 1946년 9월까지 즉 4-5개월동안 제 25소련군 참모부에서 군사통역으로 복무하였다. 그후 일개월간 소련군정 프레스-뷰로에서 지도원으로 , 1946년 10월부터 1947년 7월까지 조선인민군 참모부 정치부에서 군사통역으로 근무했다. 전 게오르기는 일년이 좀 남짓하게 즉 1948 12월까지 조선인민군 참모부 소속 군신문사에서 부주필로 근무하였다. 북조선에 있는 기간 작성된 당원등록카드의 글은 여기에서 끊어지고 알지 못하는 원인으로 게오르기는 조선에 파견되기전까지 거주하던 우스베키스탄에가 아니라 카자흐공화국의 딸듸꾸르간주에 오게 된다. 

평양주재 소련대사관에 있는 근무서류와 현재 로련대외정치 고문서에 보관되어 있는 서류를 본다면 소련고려인들의 이름을 볼 수 있는데 그들이 북조선에 있는 것이 <실천적 의의>가 없기 때문에 소련에 귀국시켰던 것이다. 그런데 고문서 문건을 인증하지 않고 북조선으로부터 전 게오르기 이와노비치의 기한전 소환에 대해 말하는 것은 불적합하다.

소련공산당원 카드를 본다면 전 게오르기가 딸듸꾸르간에 온 후에 반년동안 그 어디에서도 근무하지 않았으며 그 후에  8월부터 10월까지 즉 2개월간 딸듸꾸르간 주인민교육부에서 학교감독원으로 근무했다. 11월에 그는 이미 블라디보스톡에 있었으며 변강신문사 <꼬레이쓰끼 라보치> (조선로동자)에서 기자로 활동했다 (이런 자료가 존재하였다는데 대해서 의문이 든다 – 김 게르만 주해). 거의 일년동안 즉 1950년 8월부터 1951년 7월까지 전 게오르기는 <달리릐브스븨트>생산기지에서 통역으로 일했다. 이  자료는 <전 게오르기가 1949년에 조선에서 돌아온후 딸듸-꾸르간주 <사랴 꼼무니스마> (공산주의 서광) 꼴호스 학교에서 교장으로 일했다>는그의 딸 전 예브게니야의 말과 어긋난다 (전 예.게. 시대의 연계.-https://koryo-saram.ru/svyaz-vremen/)

전 게오르기 이와노비치는 그 후에 다시 카자흐스탄에 온다. 이번에는 남카자흐스탄주 일리춉스크구역에 왔는데 그 곳에서도 오래 머물지 않고 <뿌찌 크 쏘찌알리스무> (사회주의에로의 길)  꼴호스에서 일년동안 거주했다. 1952년 9월에 그가 또다시 우스베키스탄에 와서 중치르치크구역 제 23호 중학교 교장으로 학년도를 시작한다.  그런데 알지 못하는 원인에 의해 그는 2년후에 다시 카자흐공화국 딸듸꾸르간시에 이주하여 주인민교육부에서 감독원으로 일하면서 주내 학교들을 시찰한다. 다음 1955년부터 1957년까지 2년간 딸듸꾸르간주  한 구역에서 불완전 중학교 교장으로 근무했다. 그 후 전 게오르기는 타스켄트주  우르따사라이스끼구역에 이주하여 가서 철근콩크리트제품공장 인사과 과장으로 2년간 일했다. 다시 이웃 공화국으로 이주한 게오르기는 남카자흐스탄주 끼롭스크 구역에서 거주하면서 불완전 중학교 교장으로 일했다. 1960년에 그는 타스켄트에 돌아 와서 제 2호 도로건설 기관에서 경리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전 게오르기 이와노비치는 1961년 9월부터 3년간 상치르치크구역 제 20호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다음 까라깔빠끼야에 가서 <알띈꿀>솝호스 인사과 상급과장으로 근무했다. 1966년부터 1978년까지 년금생으로 그는 상치르치크 구역에서 거주하였다. 딸 예브게니야 게오르기예브나의 증언에 의하면 전 게오르기는 1979년 5월 27일에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타스켄트주 전 고려인 꼴호스 <뽈릿옷젤>공동묘지에 안치되었다. 많은 거주지와 직장을 바꾼 전 게오르기가 이렇게 생을 마감했다. 등록카드의 국가표창이라는 난에 세가지 국가표창이 기록되어 있는데 어떤 메달을 언제 그에게 수여했는가는 기록되지 않았다. 외국어 소유 난에 러시아어만 적혀 있는데 딸 예브게니야가 쓴바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가 조선어, 일어, 중어를 러시아어로 통번역하고 또 반대로 러시아어를 상기 나라 언어로 번역했다>고 한다. (전 예.게. 시대의 연계.- https://koryo-saram.ru/svyaz-vremen/). 카드에는 결혼에 대한 난이 비여 있다. 

전 예브게니야의 회상담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를 최혜경이라고 불렀는데 쁘리모리예변강에서 태여나 1936년에 워로실롭스크 조선사범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생년월일은 알려지지 않았다. 처음에 그는 조선학교에서 러시아어 교사로 근무했다. 그 후에 경리강습과 재봉강습을 다녔다. 집에서 재봉사로 일했으며 우편국에서 사무원으로, <소유스뻬차찌>매점에서 판매원으로도 일했다. 남편이 사망한 후에 은퇴하여 맏딸 전 에스트라가 사는 안그렌시로 이주하였다. 1994년에 세상을 떠난 전 게오르기의 부인은 안그렌시 공동묘지에 모셔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