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압당하고 행방불명이 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웅, 해군소장 김칠성

김칠성 (김 니꼴라이 그리고리예비치)은 쁘리모리예변강 포시예
트 구역에서 1926년 9월 17일에 탄생하였다. 그의 조선 이름은 여라가지 서류에 각이하게 쓰이고 있다: 김칠손, 김철손, 김칠송 및 기타로). 원동에서 그의 생활이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아마도 조선어로 교육하는 소학반을 졸업하고 열한살에 부모와 함께 강제이주되었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김칠성의 부인 박 조야 빠블로브나가 이야기하는바에 의하면 그의 가정은 타스켄트주 중치르치크구역 레닌명칭 꼴호스에 오게 되었다. 김칠성의 부모는 강제이주 과정의 고통스러운 먼 길, 우스베키스탄의 첫 겨울에 적응되지 못해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12세에 부모를 여윈 칠성을 고아원에 보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삼촌이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1942년에 칠성이가 중학을 필하고 같은 해에 중아시아국립대학에 입학하였다 (나의 남편 김성철. 박 조야 빠블로브나와의 인터뷰. 타스켄트, 2002년. 필자의 문서보관소). 그는 대학에서 중퇴하게 되었다. 그것은 그가 1943년에 징병되어 처음에 우흐따시에 있는 주 군수공업위원회에서 복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음 칠성이는 자동차사무소에서 주임으로 일하면서 우흐따시 주공업군수위원회 공청단체 비서의 임무도 수행하였다. 1945년에 중아시아 군구에 전임되어 위병대 대장으로 복무하였다. 그는 동시에 중아시아국립대학 통신과에서 공부하였다. 그후 중치르치크 구역 미꼬얀명칭 중학교 교장으로 일했다. 1947년에 그는 조선학교에서 일할 러시아어교사를 양성하는 6개월 강습을 필했는데 이 강습은 타스켄트국립사범대학에 소속되었다. 다음 중치르치크구역 미꼬얀명칭 중학교 교장으로 다시 얼마간 근무했다.

김칠성은 1947년 12월에 조선에 와서 해군전문학교에 배치를 받았다. 한일무가 편성된 북조선해군을 지휘했는데 그는 러시아 말을 겨우 했다. 직책에 따라 그가 소련고려인들과 자주 접촉하게 되었기 때문에 한일무가 김칠성을 해군 참모장으로 취직시킨 것이다. (1952년 1월 1일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기관들에서 근무하는 소련고려인들의 명단. 로련대외정치 고문서, 폰드 0102, 목록 8, 공문서 51, 철 39, 9페이지). 1948년 말에 김칠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해군 참모부 직속 작전부 부장으로 임명되었다.

김칠성은 1950년 3월에 박 조야 빠블로브나 (1932년생) 와 결혼했다. 조야는 친 삼촌 박 레오니드 마트웨예비치 (박지, 1923-1951)의 초청을 받고 북조선에 왔다. 삼촌은 1947년에 <그루빠 36>의 성원으로 북조선에 들어갔다. 박 조야는 조선에 온 후에 소련적십자사에서 통역으로, 타자수로 근무했다.
김칠성은 조선전쟁이 시작되기 전까지 해상 군사작전 강구사업을 지도했다. 그당시 북조선에는 해군력이 없었다. 때문에 미국이 조선전쟁에 끼여들자 적군의 해군력이 완전히 우세하였다. 미군함대는 북조선의 항구를 하나하나 강점해 나가면서 해안 수역을 몽땅 통제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수뢰정, 어로 모터선, 해상 육전대를 이용하는 것이 효과적이였다. 항구도시 주문진 정박지에 <발티모르>구축함을 선두로 한 미군함들이 들어왔을 때 김칠성은 몇 척의 선박들과 수뢰정을 동원시켜 가까운 간격에서 습격할 작전계획을 짰다. 수뢰정들은 직사하여 구축함과 그리 크지 않은 선박 두 척을 침몰시켰다. 이 전투가 성과적으로 끝났으나 병력이 불균등했기에 나머지 북조선 발동선들이 원산 만에 피하게 되었다. 마지막 선박들이 습격을 당하여 침몰되자 상륙부대원들이 산을 걸쳐 만포진까지 갔다. 최고사령관 김일성이 이 곳에 왔다. 그의 명령에 따라 남은 북조선 해군력이 중국인민군 부대들과 협조해야 하였다 (장학봉, 146-147 페이지). 

김칠성은 해상 전투작전을 성과적으로 전개한데 대해 1950년 12월 30일부 최고인민회의 정령에 의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웅칭호를 받았다. 그리고 1951년에 그는 해군대좌 군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해군대좌)을 받고 최고사령관의 지시에 따라 레닌그라드 군사아카데미야 학업에 파견되었다. 그 때 칠성이의 나이가 25세밖에 되지 않았다. 
사진:김칠성과 부인 박 조야

레닌그라드에서 2년 반동안 공부하여 1953년 6월에 아카데미야를 최우등 성적으로 졸업한 김칠성은 평양에 돌아왔다. 그에게 해군소장의 군칭을 주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해군 참모장으로 임명했다.
사진: 오른쪽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웅, 해군소장 김칠성, 왼쪽에 그의 전우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웅 김국록. 1953년 9월.

사진: 해군소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해군 참모장 김칠성이 소련해군 대표단과 함께. 1955년.
대폭적인 <사상적 숙청>과 소련고려인들을 반대하는 깜빠니야 시기에 이르러 김칠성의 직책이 낮아져 만경대 혁명학교 교장으로 일했다. 강상호의 말에 의하면 한번은 김칠성이 장교-교사들과의 담화에서 최신식 군사기술 발전에 대해 말하면서 <낡은 빠르찌산전쟁방법이 이미 불적합하며 지금은 기술의 시기>라고 말한바 있었다. 밀고자가 나타난 것이다. 그리하여 김칠성은 김일성이 참가한 빠르찌산 운동을 비판했다는 기소를 받았다. <경각성>을 발휘한 결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웅이 사상적 검사를 받게된 것이다. 김칠성은 그가 조선을 념두에 둔 것이 아니라 총체적으로 빠르찌산 운동에 대해 말했다고 검사원들을 설득시켜 자신의 행동을 변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또한 김일성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고 설득시켰다. 그래서 그가 기소를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1958년 11월에 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안전기관에 의해 또다시 체포되었다. 그후 그의 운명을 알 수 없다. 북조선 정권측은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그 어떤 상황에서 죽었거나 사망했다고 예측할 수 있을 뿐이다. 
1959년에 김칠성의 부인은 자식 셋을 거느리고 소련대사관의 협조하에 우스베키스탄으로 돌아왔다. 조야 빠블로브나는 남편의 운명을 알아보려고 여러 곳에 수소문을 했다. 소련외무성,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재 소련대사관, 소련해군 총 사령관에 공문도 띄웠다. 그런데 아무런 결과가 없었다. 조야 빠블로브나는 1998년에 주 우스베키스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명길 참사를 만나 김칠성의 운명에 대해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김참사는 얼마 지나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그의 남편에 대한 기소를 다 취소했고 그를 무죄로 인정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명예회복에 대한 아무런 서류도 내 주지 않았으며 참사는 곧 귀국했다. 북조선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웅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있으며 그의 생이 모국에서 언제 어떻게, 어떤 원인으로 끊어졌는지 아직까지도 모르고 있다.

박 조야 빠블로브나의 말에 의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웅 김칠성은 대담성을 발휘했으며 전투적 공로를 세운데 대해 많은 전투표창을 받았다: <자유 및 독립>훈장 1, 2급, <리순신장군>훈장, <국기훈장> 1, 2급을 받았다. 그는 또한 <전투공로>소련메달도 받았다. 김칠성은 받은 표창들을 체포된 후에 다 압수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