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인노껜찌 빠블로비치 – 건설기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무성 부상

공식적 서류에는 김 인노껜찌 빠블로비치라고 적혀있다. 북조선에서는 그를 김광현이라고 불렀다. 그의 자식들인 알라와 유리가 그에 대한 자료를 우리에게 제공하여 주었다. 평양에서 소련에 귀국하기 직전에 김 인노껜찌가 직접 쓴 자세한 자서전이 특별한 관심을 이끈다. 거기에는 그가 탄생한 때로부터 북조선을 떠나기 전까지 생활과 활동이 자세히 기록되었다. 그는 북조선 체류시기의 년간에 대해서도  쓰고 있다. 소련에서 김 인노껜찌의 그 후 생활에 대해서는 딸 알라와 아들 유리가 회상담에 이야기 하였다. 김 인노껜찌의 자서전과 직업은 북조선에 파견된 다른 소련고려인 그루빠 참가자들과 차이났다. 다수 고려인들이 그랬듯이 그는 교사도, 당 간부도 아니었다 – 그는 공업 및 민간 건설의 경험있는 전문가였다.
    

김 인노껜찌는 원동의 수이푼구역 꼬르싸꼽까촌의 빈농의 가정에서 1911년 2월 1일에 태여났다. 1919-1923년 기간에 소학반에서 공부했고 다음 라스돌늬 중학교에 입학하여 1927년까지 이 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런데 그후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부모들의 농사일을 돕게 되었다.
    1929년에 18세인 김 인노껜찌는 중학 6학년의 지식을 가지고 우랄에 가서 2년간 니즈녜따길 야금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했다.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중등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인노껜찌는 노동자대학예비교 강습을 필하고 공청동맹단체의 파견장을 가지고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타스켄트로 갔다. 1932년 6월에 그는 중아시아 국립대학에 입학하여 2년동안 공부한 후에 중아시아공과대학에로 옮겼다. 인노껜찌는 이 대학을 1940년에 필하고 공업-민간 건설 인지니어의 졸업증을 받았다. 인노껜찌는 대학을 졸업한 후에 건설중인 꼬운라드 광산 (북부 쁘리발하시예 – 중아시아에서 규모 큰 구리 및 몰리브덴광 산지)의 민간 시설 설계가로 파견되었다. 
    1940년 11월에 인노껜찌 빠블로비치를 타스켄트즈 치르치크시에 있는 전기화학 공장에로 전임시켰는데 전쟁시기에 이 공장이 기계제작업의 중심으로 되었다. 그는 1942년까지 이 공장에서 설계가로 근무했다.
    김 인노껜찌 빠블로비치는 우스베키스탄에서 앞으로 안해가 될 아가씨를 만났다. 리 니나 니꼴라예브나는 그당시 타스켄트 의대에서 공부하였다. 그들이 결혼하여 북조선에 파견되기 전에 아들 유리 (1942년생)와 딸 알라 (1946년생)가 태여났다. 니나 니꼴라예브나는 타스켄트주 레닌명칭 꼴호스에서 일하면서 지방 병원의 사업을 정돈하면서 동료들과 환자들의 존경과 신임을 얻었다.
    1942년에 김 인노껜지를 중치르치크구역에서 꼴호스들을 조직하는 사업에 파견했다. 짧은 기간에 소비를 최소한 적게 들여 축산업에 필요한 건물, 꼴호스 발전소, 경영대상과 수로와 천연 저수지를 건설해야 하였다. 
    1946년에 이르러 유식하고 경험있는 전문가로, 정직하고 근면한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때문에 그가 북조선에 파견할 소련고려인의 명단에 오른 것이 우연한 일이 아니였다. 북조선에 파견된다는 소식을 들은 니나 니꼴라예브나는 절대 반대였다. 인노껜찌 빠블로비치가 통례로 안해의 의견에 동의했지만 북조선에 가는 문제에 들어가서는 결심을 바꾸지 않았다. 안해는 보트낀명칭 모스크바 클리닉 연구과에서 공부하려던 꿈을 부득이 버리게 되었다.
    인노껜찌 빠블로비치는 북조선으로 가는 도중에 남 야꼬브 뻬뜨로비치와 면목을 익혀 친근하게 되었다. 후에 남 야꼬브 뻬뜨로비치는 남일이라는 이름으로 온세계에 알려진다. 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명의로 미국과 정전협정을 서명하였다. 김 인노껜찌 빠블로비치와 남일의 우정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북조선에 온 인노껜찌 빠블로비치는 평양시 총 인지니어로 민간건물 건설을 맡게 되었다. 그는 이 분야에서 경험있는 전문가, 능숙한 조직자로 보여 얼마 지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영성 부상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이 직책에서 조선전쟁이 시작되기전 즉 1950년까지 근무했다. 1947년에 그는 조선로동당에 입당하였다. 
    조선전쟁 시기에 대좌의 군칭을 가지고 조선인민군 총참모부직속 건설관리국 국장의 업무를 수행하였다. 방어시설 건설을 조직하며 교량과 나룻터들을 복구하고 수리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그는 방공호 그리고 사람들의 동원을 요구하는 기타 대상을 건설하고 그에 필요한 기계, 도구, 건재를 보장하였다.
    전쟁시기에 소련고려인들의 기타 가들과 마찬가지로 김 인노껜찌 빠블로비치의 가정도 하르빈으로 철수되었다. 모든 가족들이 합숙소에서 거주하였다. 아이들이 많아졌기에 니나 니꼴라예브나가 소아과로 일하기 시작하였다. 인노껜찌 빠블로비치도 역시 하르빈에 왔다 – 전선에서 부상을 당한 그는 지팡이를 짚고 겨우 움직였다. 중국 의사들이 그를 치료하여 제 발로 걸어다닐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지하 대상들에서 힘든 로동조건으로 하여 페와 관절 병을 앓게 되었다.
    1951년에 인노껜찌 빠블로비치를 출정군에서 소환하여 경영성 부상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이 직책에서 1953년까지 일했다. 그것은 국가건설위원회가 형성됨에 따라 그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건설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임명했기 때문이다. 인노껜찌 빠블로비치는 1958년에 소련으로 귀국할 때까지 이 업무를 담당하였다.
사진: 수행원들과 함께 지역을 돌아보는 김일성. 앞줄 오른쪽으로부터 두번째가 김 인노껜찌 빠블로비치
    그들앞에는 어려운 과업이 나서고 있었다. 파괴의 범위와 복구작업량은 실로 막대하였다: 평양시를 대폭적으로 폭격한 것은 전쟁전에 있던 8만동의 집중에서 6만 4천동을 파괴했다. 그리고 관개제방이 거의 다 전멸되었다. 농산지의 큰 면적이 침수되었는데 그로 하여 후에 굶주림을 겪게 되었다. 
    인민경제를 복구하기 위해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1953년 8월에 나라 경제발전 3차 (1954-1956) 계획이 채택되었다. 이 계획이 성과적으로 수행되었다 - 300여개의 공업대상이 복구되거니 신설되었다. 소련, 중국 기타 사회주의 나라들에서 현저한 원조를 무상으로 받았다. 소련은 대규모적 일부 공업대상들을 복구 및 건설하는데 협조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북조선에 각이한 공업설비를 공급했으며 중국전문가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철도복구, 교량건설 기타 대상 건설에 참가했다. 다른 사회주의 나라들은 북조선에 기대, 설비, 강철압연, 의약품, 경공업을 위한 원료를 제공하였다. 
    인노껜찌 빠블로비치는 이 시기에 외국 출장을 많이 다녔는데 그 과정에 북조선에 국제원조를 주는 문제들을 해결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에서 진행된 국제건축가 회의에 인노껜찌 빠블로비치가 참가한 사진들이 있는데 그는 그 회의에서 보고를 하였다.
    인노껜찌 빠블로비치에게는 특출한 조직자적 실력, 큰 범위의 전략적 사고력이 있었으며 내 세운 목적과 과업을 실천하기 위해 많은 기관과 기업소, 지도자들과 전문가들을 결속시키고 그들의 노력을 조정할 줄 알았다. 바로 여기에 그의 공로가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앞을 내다 보고 사엉의 계획을 짰다.  김 인노껜찌는 훌륭한 건설공, 건축가의 능력을 시위했다. 평양에는 그의 참가하에 건설된 건물과 시설이 아직도 보존되어 있다. 평양의 중앙 광장이 그런 대상들중 하나이다. 이 광장에서 군사열병식과 기타 기념행사들이 진행된다. 그는 성실한 로력에 대해 제 2급, 제 3급 국기훈장으로 표창되었다. 
    북조선에서 대중적인 사상적 숙청이 시작되었을 때 김 인노껜찌 빠블로비치도 조사를 면치 못했다. 그러나 그가 항상 자기의 직업적 활동에만 몸담고 정치적 투쟁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겸손하게 살고 모범적인 가장이였기에 그를 반대하는 심중한 기소를 찾아내지 못했다. 그러나 분위기가 불안정하고 소련고려인들에게 대한 압력이 심해졌기 때문에 인노껜찌 빠블로비치는 가족과 함께 소련에 귀국하기로 결정했다. 자식들과 안해의 의견이 북조선에 남으려는 그의 소원을 압도했다.
    인노껜찌 빠블로비치는 소련에로의 귀국에 대한 청원을 올렸다. 이와 관련하여 그는 두번 김일성의 접견을 받았다. 김일성은 인노껜찌를 잘 알고 있었으며 그에게 친절하게 대하였다. 귀국문제에 들어가서는 인노껜찌가 두번 다 김일성의 거절을 받았다. 그런데 김일성 비서의 도움으로 소련에로의 귀국허가를 받게 되었다.
    김 인노껜찌 빠블로비치는 모스크바에 돌아온 후에 까렐리야공화국 소베트인민위원회 (뻬뜨로사워드스크)를 자기 사업의 장소로 택했다. 평양에서 12년간 일한 후에 귀국한 그는 전혀 다른 분위기에서 사업하게 되었다. 사람들의 사고방식도 다르고 행동도 달랐다. 그러나 직업적 경험이 많은 지도자인 그는 우수한 품성을 발휘하여 얼마지나서 주위 사람들의 존경과 위신을 얻었다. 그는 뻬뜨로사워드스크에서 소련공산당에 입당했다. <뻬뜨로사워드스크쁘롬스트로이>트레스트에서 그는 쨔스붐마스 공장 건설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사진: 뻬뜨로사워드스크에서 살던 시기에 김 인노껜찌 빠블로비치의 가족들 (1960년도 초기)
    1962년에 인노껜찌 빠블로비치는 카자흐스탄의 <알말릐크스위녜쯔>트레스트에서 책임 기사로 근무하던 대학생 시절의 친구 김 왈렌찐 니꼴라예비치의 제의에 따라 가족과 함께 알말릐크로 이주하여 왔다. 그는 상기 트레스트에 취직하여 총 기술공정원으로 마지막 날까지 일했다.
    김 인노껜찌 빠블로비치는 장기 병환끝에 1965년에 사망하여 모스크바의 워스트랴꼽쓰꼬예 공동묘지에 안치되었다. 그의 나이가 54세였다. 장례식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함께 일했던 그의 많은 친구들과 동료들이 참석했다.
    니나 니꼴라예브나는 수월치 않은 오랜 생을 살았는데 그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이 행복한 생이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88세를 일기로 2007년에 사망하였다. 남편이 돌아가신 후에 그는 혼자서 자식 넷을 키웠다 – 아들들 알렉산드르 (19년생)와 겐나지 (1954년생)는 북조선에서 태여났다. 자식들이 다 고등지식을 소유했다. 맏아들 유리 인노껜찌예비치는 아버지가 어렸을 때 희망했던 꿈을 실현하였다 – 그는 러시야해군에서 복무하면서 해군대령의 군칭까지 받았다.

김 게르만 – 역사학 박사,

알-파라비 명칭 카자흐국립대 한국학 센터 소장,

교도 종합대학 동남아시아 연구 센터 소장